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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의 가난한 사람들 본문

성서의 가난한 사람들

빛나는 새벽별 2018. 8. 19. 20: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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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서인석

 

출판사 : 분도

 

가격 : 8,000원

 

       현재 대한민국의 30대들은 IMF와 함께 세계 경제 위기를 겪으면서 안정성이라는 것을 추구하는 경향이 강하게 존재한다. 특히 직업의 안전성과 삶의 안정성 등을 추구하려는 이유는 안정된 수입은 부의 축척을 의미하지는 않아도 가난한 삶을 살지 않을 수 있는 보장성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인류의 역사를 돌아보았을 때, 현재까지 모든 사회에서 빈부의 문제는 동반되어 왔지만 이것에 대한 명확한 해결책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은 그만큼 해결하기가 쉽지 않은 문제임을 말한다고 할 수 있겠다.

 

       옛 이스라엘의 삶의 형태는 사막에서의 유목생활을 기초로 하는 형태였고 가나안의 정착을 기점으로 하여서 사유재산이 생기기 시작하며 계급분화가 이루어졌다. 즉 정착 전에는 혈연 사회에서의 사회적 고립자들인 사회적 약자(과부나 고아, 노인, 이방인, 장애인 등)에 대하여 사회적 책임감과 연대의식으로 돌봄이 가능하였지만 정착 후에는 가난도 사회적이며 조직적으로 구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구약의 하나님은 약자들을 돌보시며 편드심으로써 즉 편드심의 하나님의 모습을 통해서 하나님의 정의가 이루어짐을 볼 수 있다. 롤즈의 정의론 중에 차등의 원칙 즉 모든 사람에게 똑같은 권리 배분이 평등이 아닌 약자에 대한 배려가 필요하다는 것을 통해서 절대적 평등이 아닌 차등의 원칙을 통해서 사회 정의를 실천해 나가려는 노력을 볼 수 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편듬과 차등에는 내재적 완벽성이라는 것이 전제되어 있기에 행하시는 자체가 문제가 없는 선이지만 인간이 행했을 시에는 그 적용의 원칙이 정확하지 않은 사회과학적인 부분이기에 즉 자연과학적인 부분이 아니기에 정확한 기준에 대해 요구한다고 할 수 있겠다. ‘사회적 약자가 어디까지이며 이들에게 어디까지 양보하고 배려해 주어야 하는가?’ 와 같은 문제에 대해서 모두가 납득하고 이해할만한 명확한 답을 제시하지 못하기에 현대에 이르기까지 가난이라는 문제가 존재하는 것이고 미래에도 존재할 것이라고 예상할 수 있다.


       가난이란 인간에 의한 인간의 수탈이며 인간 사회의 기형적인 구조로 인하여 발생한 결과물이라고 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 통치 후 보시기 좋았더라 하는 세상에서는 가난이란 존재하지 않았고 그것은 가난이라는 것은 하나님께 나온 것이 아닌 사회적 죄악이 빚어낸 결과물이라고 할 수 있다. 즉 가난에 저항한다는 것은 가난을 만든 사회에 대해 맞서는 것이며 인간의 본성에 대해 도전하는 행위라고 할 수 있다. 가난에 대해 접근할 때 가난에만 집중하는 것이 아닌 사회적이며 종교적으로 다양한 시각과 접근방법을 가지고 이해되어 해결하려고 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그 이유인 즉 가난이라는 것은 어느 한 부분에서만 기인한 것이 아닌 모든 방면에 있어서 연결되어 빚어낸 잘못된 결과물이기 때문이다. 가난이라는 것은 인간의 삶에 있어서 굴레이며 큰 인생의 짐이다. 즉 종교는 가난한 사람들과의 연대하며 그들의 해방을 위해서 앞장서야 할 필요성이 있다. 특히 라는 것으로부터 억압된 인류를 구원하고 자유함을 주기 원하는 기독교는 다른 타 종교들보다 가난의 해결과 사회적 약자들에 대한 따뜻한 관심과 지원을 더 해야 된다고 생각한다. 기독교는 그 원리와 대상에 대해서 항상 기억하고 있어야 하며 또 그 목표를 행하는 것에 있어서 이상과 실재의 괴리가 존재치 않도록 하는 것이 필요할 것이다.

 

       성서에의 가난한 사람들은 정신적인 가난한 사람들과 물질적인 환경에 가난한 사람들 두 부류로 나누어 볼 수 있겠다. 먼저 정신적인 가난한 사람들은 성경에서는 구약의 여러 남편을 둔 여인과 신약의 삭개오를 들 수 있겠다. 이 두 사람은 남자와 돈이라는 것 즉 외부적인 환경에서 만족함을 찾으려고 하지만 그것들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공허하고 만족함이 없는 가난한 상태에 빠져있음을 볼 수 있다. 현대 사회에서 특히 대한민국은 짧은 시간 안에 많은 물질적인 부를 누리고 있지만 풍요 속에서 정신적으로 빈곤하거나 정신적인 가난을 겪고 있는 사람들이 늘어가고 있는 현실 속에서도 발견할 수 있겠다. 즉 소유의 많고 적음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떤 것을 소유하고 있느냐 즉 만족함이 있느냐에 대해서 생각해 볼 수 있겠다. 현 경쟁 사회에서는 절대적인 빈곤이 아닌 상대적인 빈곤이 큰 비중을 차지하며 타인보다 더 앞서거나 많이 소유해야 된다는 생각에 사로잡혀있다. 즉 가진 것에 대한 감사 내지는 가지고 있는 것에 대한 소화보다는 가지지 못한 것에 대한 아쉬움과 앞으로 더 소유해야 될 것에 대한 압박감으로 스스로를 채찍질하며 벼랑으로 몰아가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이런 사회적 풍토 속에서 과연 기독교는 어떠한 의미와 행위를 하고 있는가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경제 난 속에서도 거대 교회의 무리한 확장 내지는 기독교인들이 사회에 나가서 빈자들을 돌보고 사랑을 베푸는 것이 아닌 기독교인들만의 단합으로 비기독교인들에게 베타성을 보이는 행위 등을 통해서 과연 세상을 구원하러 또한 억압의 굴레에서 해방을 주기 위해 세상으로 내려오신 예수님을 믿는다는 기독교인들의 행위의 정당성이 물질의 풍요 속에서 점점 잊혀짐과 잃어버림 두 가지가 동시에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 아닐까?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낙타가 바늘구멍에 들어가는 것보다 어렵다고 말씀하신 것을 보면 오직 물질의 축복이 축복이 아닌 물질의 축복 속에서 정신적으로 가난하지 않는 상태를 유지하는 것 즉 물질을 다스릴 수 있는 마음을 가지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닌가 생각해본다. 그렇다면 정신적인 피폐와 상처가 오히려 더 입기 쉬운 현 사회에서 기독교인은 무엇을 해야 하는가? 라는 질문에 사랑이라는 것으로 답할 수 있겠다. 믿음 소망 사랑 그중에서 제일은 사랑이라는 말씀과 사랑은 허다한 허물을 덮는다는 말씀을 통해서 타인에 대한 사랑 그것을 행함에서부터 시작되어 사랑하는 사람과 사랑받는 사람 모두를 회복시키는 힘이 있다고 말씀한다. 또한 하나님은 사랑이시라는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의 본성인 사랑에 대한 회복과 그 사랑을 나누어 줄 의무가 있는 기독교인들이 메마른 사회에서 어떤 역할을 수행 해야 하는가와 어떻게 선한 영향력을 끼쳐야 하는가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다.

 

       두 번째로 앞에서 언급한 고아와 과부 나그네와 같이 물질적인 환경에 가난한 사람들을 볼 수 있다. 이 당시의 사회는 가부장 사회이며 남성 중심의 사회이다. 즉 어머니는 계시더라도 열악한 권리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아버지가 돌아가시면 아이는 곧 고아가 되며 권리적, 물질적 면에서 보호를 받을 수 없었다. 또한 과부는 결혼함으로 친정에서 상속적 관계가 단절되며 남편이 죽음으로써 상속권이 소멸되어서 물질적인 소득이 불가능한 상태에 이르게 된다. 마지막으로 나그네는 권리가 없는 떠돌이를 일컫는 말로 혈연관계가 없기에 모든 생활에 있어서 혼자 유지해야 되는 열악한 환경에 처해 있는 사람이라고 하겠다. 시간이 흘러갈수록 과학과 인류의 지식이 발전함으로 분명 모든 사람들이 누린다면 더 살기는 좋아졌지만 소수에게 부가 편중되는 것 즉 2080의 사회와 같이 20%의 사람이 지구의 80%의 자원을 소비하는 것과 중산층이 점점 줄어들고 빈부의 격차가 커짐이 극명해지는 것을 보면서 현 지구상의 나라들이 채택하고 있는 자본주의가 역사를 통해서 매력적인 이념이지만 현 인류가 그만큼 자본주의의 위험성에 대해서 안이하게 대처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본다. 지구에 존재하는 물질과 비물질적인 모든 요소에는 이()와 해()가 동시에 공존하기에 인류는 이()는 극대화하고 해()는 최대한 줄이려고 하는 노력을 기울여왔다. 하지만 이라는 부분에 극대화로 집중하여 해에 대해서 점차적으로 무디어져 결국에는 해에 관하여 생각하지 않거나 과소평가하게 되는 과정을 거치게 되는데 자본주의가 그런 형태가 아닌가 생각해본다. 즉 인류에게 자본주의가 아닌 다른 이념과 함께 다른 시장 경제 체제의 확립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정리하면 물질적인 풍요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아직도 빈곤 속에 처해 있는데 이런 물질적인 가난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기독교인 개개인만의 노력이 아닌 사회 구조 차원적인 노력과 분배의 정의가 올바르게 실현되는 사회를 구성하도록 노력해야 된. 가난이라는 것은 한두 사람의 노력으로 바꿔지지 않는다는 것을 우리는 역사를 통해서 배웠다. 그렇기에 가난의 개선을 위해서는 먼저 기준의 정확성을 정해야 된다고 생각한다. 사회적 약자가 어디까지이며 어느 부분까지 얼마나 차등을 둘 것인가와 같은 애매모호함에 대하여 최대한의 명확성을 띄게 정의하는 과정이 필요할 것이며 정의되는 것이 실현되게 하는 제도적 장치 또한 필수적인 면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마지막으로 성경 속에서 항상 옳은 소리와 잘못된 상황에서 회개와 쓴 소리를 외쳤던 선지자들의 역할을 기독교인들이 현 사회 속에서 감당해야만 한다. 선지자들은 항상 하나님의 편이며 잘못된 사회에 대하여 울분을 토하며 거룩한 분노를 감당하는데 지금은 부조리나 잘못된 모습들을 보면서 그것을 변화시키기 위해 어떠한 노력을 하는가 생각해본다. 뉴스나 신문 언론 매체를 보았을 때, 많은 범인들이 기독교인들이며 특히 정치적인 면에 있어서 종교를 이용하거나 앞뒤가 다른 정치인들을 보면서 종교의 궁극적인 선와 올바름이 이들에게는 실천의 가치가 아닌 단지 존재의 가치로써 그들의 삶에 있어서 타당성과 올바름을 표면적으로 사람들에게 보여주는 측면만으로써 존재하고 있는 것인가라고 생각해본다. 그렇다면 정작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가 돌이켜 보게 되었다

       

       법이라는 것은 조화와 분리라는 것에 경계를 확실히 그어주는 수단이라고 생각한다. 법을 통해서 서로 간의 삶이 유지되며 때로는 조화로 때로는 개개인의 권리의 유지와 분리라는 모습으로 드러난다고 생각하는데 법을 하기 위해서는 모든 영역에 있어서 기본 이상의 지식을 가지고 최대한의 것을 고려할 수 있는 사고가 필요하다고 느껴진다. 하나님께서도 때로는 조화의 모습으로 때로는 편듬의 모습으로써 정의를 실천하셨듯이 정체성을 잃어버리지 않는 범위 내에서 다양성을 인정하고 추구하려는 노력 또한 요구된다고 생각한다. 가난이 의미하는 것은 작게는 물질과 정신적인 가난을 의미하지만 크게는 사회적인 부조리와 잘못으로 고쳐야 할 모든 것이 가난이 될 수 있다. 즉 넘치지도 않고 부족하지도 않는 최적의 상태에 대한 추구와 갈망에 따른 인간의 소망이 온전히 이루어진다는 것은 불가능하겠지만 그것을 추구함으로써 겪어지는 과정과 얻어지는 결과를 통해서 조금씩 더 가난에서 멀어져서 결국에는 온전함에 가까움을 이룰 수 있는 가능성을 하나님께서 남겨두신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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