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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돈내산 & 추천제품 리뷰
신 정의 사랑 아름다움 본문
저자 : 장 뤽 낭시
출판사 : 갈무리
가격 : 17,000원
인간은 기본적으로 여러 가지에 대하여 알고 싶어하는 궁금증을 가지고 있다. 인류의 발전은 인간이 가진 질문, 특별히 ‘왜?’ 라는 질문으로부터 시작하여 현대 문명의 대부분을 이룰 수 있는 과학과 발전의 근거를 마련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수학과 과학의 발전으로 인류는 많은 문명의 혜택을 누리며 살고 있게 되었고, 기본적인 의식주 생활을 누리며 사람의 기본생활을 영위하고 그 이상의 문명 또한 맛보며 살고 있다. 하지만 발전하면 발전할수록 인류는 그만큼 보이지 않는 것 내지는 계량화 되지 않는 추상적이며 형이상학적인 가치에 점점 관심을 가지게 된다. 학문적으로는 철학이나 신학 등 자신의 뿌리나 이 세계를 넘어선 것에 대한 궁금증, 그리고 이 세계 안에서도 우리가 느끼긴 하지만 정확히 알지 못하는 것들에 대하여 탐구하려 한다. 그러한 현상이 인문학과 신학, 그리고 철학의 발전을 가져오게 되었고 이러한 물질적, 정신적 풍요 가운데 사람을 잃어버리지 않기 위해서 우리는 지극히 인간다움 의 기본 가치에 대하여 고민해야 한다. 지금부터 ‘신 정의 사랑 아름다움’ 이라는 책을 통해서,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4가지의 주제에 대하여 여러 가지 시각으로 생각해 보고 접근해 보고자 한다.
우리는 흔히 ‘신이 존재하는가?’ 혹은 ‘신을 본다면 내가 믿겠다’와 같은 말들을 자주 접하곤 한다. 그만큼 신에 대한 호기심은 인류가 시작된 시점부터 지금까지 계속적으로 등장한 인간의 본능적인 질문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모든 종교는 기본적으로 신을 지니고 있다. 그 신이 우리가 믿어야 할 존재인지, 아니면 뛰어넘을 존재인지, 우리를 도와주는 존재인지에 대한 시각은 각각의 종교마다 다른 입장을 취하고 있지만 종교에서 가장 중심이 되는 것인 신 그 자체이다. 그렇기에 많은 사람이 종교에 대하여 신을 보고 싶어 하고 설사 믿지 않는 사람일지라도 신에 대한 전능성에 대하여는 그리 의심하지 않는다. 하지만 책을 읽으면서 생각하게 된 것이 ‘과연 신을 우리가 인식할 수 있는 존재인가? 그리고 신의 존재가 우리에게 인식되고 우리가 이해할 정도라면 그것이 과연 신인가?’ 라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일말의 가능성으로 인간은 신에 대하여 굉장히 추상적인 개념을 가질 수는 있다. 하지만 우리가 신을 보거나 완벽하게 알 수 있다면, 신이라는 존재를 우리의 언어나 이성에 가두거나 형상화 시킬 수 있다면 그것 자체가 이미 신의 영역이 아닌 인간의 영역으로 제한되어 버리는, 신의 전능성이 침범되는 결과가 도출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동양 철학에도 ‘도가도 비상도’ 라는 말다. 도를 도라고 말할 수 있다면, 그것은 도가 아니라는 뜻인데 이것은 비단 도만이 아니라 우리가 이야기하는 신, 이 신이 기독교이든 천주교이든 이슬람이든 상관없이 신을 언어 혹은 생각으로 제한할 수 있다면 그 자체가 신이 아닐 수 있는 존재가 되어버린다. 또한 ‘신적인 장소가 특별한 곳에 있지 않기 때문에 오히려 도처에 있는 것과 같다’라는 말을 통하여 하나님을 생각하게 되었다. 구약을 보면 기본적으로 하나님께서는 성전에 머물러 계시지만, 그 하나님이 지금 여기에도 머물러 계시고 말세의 심판의 날에도 동시에 머물러 계신다는 것, 즉 통시적, 공시적으로 동시에 존재할 수 있으신 분으로 시간과 장소에 구애를 받지 않으시는,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무소부재라고 고백할 수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해 본다.
하나님의 계획은 우리의 사고와 생각과 기본적으로 다르기 때문에 우리는 피조물이고 그분은 창조주이시기 때문에 신에 대한 궁금증을 가지는 것이 인간이 가진 기본적인 본능적인 호기심이고 그것이 결코 잘못되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한 가지 생각해 보아야 할 점은, 우리가 신에 대하여 특별히 기독교의 하나님에 대하여 알 수 있는 부분은 그분이 알려주시고 계시해 주시는 그 부분 딱 거기까지이다. 더 이상 알려고 하거나 그 이상을 하나님께 요구하는 것은 피조물로서 올바른 자세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이제는 하나님께서 옛날과 같지 않게 특별한 사람을 선택하셔서 계시하시는 것이 아니라 일반적으로 성경을 통하여 모든 사람에게 말씀하시는 것을 생각해 볼 때, 우리가 먼저 하나님을 알기 위해서는 성경에 대하여 올바른 이해와 탐구가 있어야 할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또한 우리가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은 옛날 사람들이 시대와 장소를 막론하고 신을 가르쳐 주지도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원시시대부터 신에 대한 인식이 분명히 있었다는 점이다. 즉 잘 알 수는 없지만, 굉장한 추상성을 지니고 있지만 절대적 존재에 대한 믿음이 존재했고 그것이 각 대륙 각 시간마다 드러난다는 것은 신에 대한 앙망과 인지가 보편적 인류에게 존재했음을 증명한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은 인간이 기본적으로 신을 필요로 하는 것이며 그 숭배의 목적이 풍요이든 본능이든 사람의 존재는 어떤 시대조차도 신과는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는 불가분의 관계 속에 있다는 것, 즉 사람을 알기 위해서는 신을, 신을 알기 위해서는 사람을 알려는 노력이 있어야 한다고 할 수 있겠다. 기독교적인 관점에서도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 즉 이마데고를 지니고 있기 때문에 사람을 통하여 하나님의 형상이 드러나곤 한다. 특별히 믿지 않는 사람들이 믿는 사람들을 통하여 하나님을 느끼거나 알 수 있게 되는 일들은 우리가 지음을 받은 하나님의 형상을 지니고 있는 피조물 된 인간이기 때문에, 반대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창조하셨기 때문에 하나님을 아는 것이 사람을 알아가는 일이라고도 생각해 볼 수 있다. 즉 신학은 하나님을 알아가고 사람을 알아가는 일이며 율법의 계명도 결국은 하나님 사랑이며, 하나님의 형상을 담고 있는 이웃에 대한 사랑으로 줄여볼 수 있을 때, 우리는 2가지 다 소홀하게 생각할 수 없다는 결론을 얻을 수 있다.
다음으로 정의에 대하여 생각해 보려고 한다. 책을 통해서 먼저 생각해 보게 된 것은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정의’라는 단어가 과연 올바른 뜻으로 사용되고 있는가?”였다. 물론 어떠한 학문에서든지 용어의 정확한 정의는 학문의 첫 출발점이라고 할 수 있다. 그만큼 용어의 올바른 의미의 해석과 범위를 지정하는 것은 무엇보다도 중요하며 이것은 상호 간의 약속이 되기 때문에 언어가 다르더라도 소통할 수 있는 근거가 된다. 하지만 정의가 항상 있어야 하는 ‘법’이라는 것을 생각해 보았을 때, 벌써부터 미국과 한국은 법에 대한 접근의 시각이 다르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미국에서의 법의 궁극적 목적은 화(和)이며 만족(滿足)이다. 즉 절대적인 선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상호 간의 원고와 피고가 만족할만한 결과를 도출할 수 있다면 그것 자체가 선이기 때문에 최종적인 결과가 사회적으로 혹은 도덕적으로 올바르지 못하더라도 양측 간의 합의나 만족이 있다면 그것으로서 정의가 실현된다. 미국에서 유능한 변호사는 절대적인 선을 지키는 변호사가 아니라 불리한 재판을 설사 그것이 사회적으로 지탄을 받는 일이라 할지라도 그 판결을 뒤집을 수 있는 변호사가 유능한 변호사이다. 하지만 한국을 생각해보면, 물론 미국을 많이 따라가고 있는 추세이긴 하지만, 사회적인 큰 사건들을 따져본다면 설사 그 재판에서 패소하거나 기각당하는 일이 있더라도 끝까지 올바른 선택을 한 자가 정의로운 자로 여겨진다. 우리가 흔히 하는 말로도 ‘끝까지 가보자’ 라는 말이 있다. 이 말인즉, 누가 옳은지 누가 정의로운지 궁극적으로 판결을 내보자 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이와 같이, 같은 법 안에서도 법을 이용하거나 법이 추구하는 사회의 정의 모습이 다르기 때문에 정의라는 개념의 확실성을 설정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두 번째로, 정의에는 반드시 자유와 평등이라는 2가지의 가치가 함께 실현되어야 한다. 하지만 자유와 평등이라는 가치는 한쪽을 우위에 놓으면 한 쪽 가치가 내려가게 되는, 인류가 반드시 놓치지 말아야 하는 가치들임에도 불구하고 동시에 실현시키는 것이 결코 쉽지 않은 가치라고 할 수 있다. 평등도 우리가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 기회의 평등과 결과의 평등 앞에서 우리는 어떠한 선택을 하는 것이 정의로운가? 에 대하여 질문해 보아야 한다. 그리고 배분적인 평등과 사회적인 평등, 즉 개체주의적 평등과 사회주의적 평등 앞에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하는 질문도 피할 수 없다. 평등 안에서도 여러 가지 형태의 평등의 모양으로 나타나고 그 평등이 양쪽을 택하며 균형적으로 사회가 나갈 수 있다면 더없는 이상적인 모양이겠지만 평등을 계량화하여 반반 나눌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우리는 언제나 선택을 해야 한다. 그것이 어느 입장을 대변하고 내가 어느 위치에 포함되어있는가? 하는 문제로 결국은 나의 이익이나 생존과 연관되는 문제이기에 사회적으로도 충돌할 수밖에 없고 그것을 조율해 주는 가치가 정의가 되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해본다. 정의라는 것이 객관적인 요소로만 이루어져있고 수치화 계량화 될 수 있다면 실현시키는 것에 있어서 많은 어려움이 존재하지 않겠지만 이 가치는 우리가 환산할 수 없는 부분이 있고, 하지만 반드시 실현시켜야 할 가치이다. 인류의 많은 사람들이 자유와 평등을 얻기 위해서 피를 흘렸고 목숨을 잃었다는 것을 생각할 때, 우리가 한 가지 더 생각해 보아야 하는 것은 우리가 지금 누리고 있는 만큼의 자유와 평등, 정의를 실현하기 위해서 ‘어떠한 노력을 하고 있는가?’이다. 근대 한국사만을 생각해 보아도 3.15 부정선거를 통한 4,19혁명, 5,18 광주 민주화 운동, 6월 민주항쟁 등 많은 사건이 있었고 앞선 세대의 대가 지불이 있었기에 지금이 가능했다는 것을 잊으면 안 될 것이다. 그렇다고 지금 당장 자유와 평등, 정의를 위해서 나가 싸우라는 말이 아니다. 우리 사회를 잘 돌아보면 많은 사건들이 일어나고 있다. 그것이 부조리부터 시작하여 부당함, 부정의 등 잘못된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고 사회를 병들게 하고 있다면 그것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우리가 그것을 알고 고쳐가려는 노력이 있어야 한다. 특별히 대한민국에는 이번에 세월호라는 사건을 통해서 총체적으로 많은 잘못과 비리, 그리고 부조리가 한꺼번에 드러나게 되는 사건을 겪게 되었다. 많은 학생이 죽었음에도 불구하고 누구 하나 책임지는 사람이 없는, 사건 발생 당시부터 문제 해결 능력의 부재를 보여주며 사회의 어두운 모습을 보여주는 한 사건이라고 생각한다. 더불어 명량이라는 영화가 1700만 명 이상의 사람들이 볼 수 있었던 것도, 이 시대에 올바른 지도자, 정의로운 지도자에 대한 갈망이 이순신이라는 국가를 지키고 일으킨 위인을 통해 투영된 결과라고 생각한다. 정의로운, 애국심 있는 사람이 적고 그런 지도자가 부재했기 때문에 영화를 통해서라도 그것을 보기 원했던 국민들의 염원이 숫자로 드러난 사건이라고 정리할 수 있다.
‘정의로운 사회’는 어느 시대와 민족, 국가를 막론하고 모든 국민들이 실현되기 원하는 가치였고 모든 국가 또한 정의로운 국가를 표방하고 이룩하기 위해서 법을 제정하고 실현해 나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국가들이 정의롭지 못하다는 생각을 하고 정치인들이, 특별히 법을 만들고 집행하는 입법부와 사법부 사람들이 비난을 받는 것을 보면서 이 땅에 정의에 대한 실현은 정치로 되는 것이 아니라 국민으로부터 이루어져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정의는 한사람 내지는 소수가 행한다고 행해지는 가치가 될 수 없다. 모두의 노력을 필요로 하고 모든 사람의 땀을 필요로 하기 때문에 작더라도 자신이 정의로운 행동을 할 수 있어야 한다. 이 부분에 있어서는 사회적인 의식구조의 개혁이 전반적으로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어른들은 말씀하신다. 모난 돌이 정 맞고, 불의를 봐도 참을 줄 알아야 하고, 무난하게 살라고 말이다. 하지만 잘못된 것에 대하여는 말할 줄 아는, 행동할 줄 아는 용기가 필요하고, 불의에 대하여는 올바름으로, 정의를 실현하려는 노력이 있어야 하며 무난하게 사는 것이 아니라 정의롭게 올바르게 살 수 있도록 격려해주셔야 한다. 요즘 사회 가치의 우선순위가 돈이 되어버리고 그것이 결국은 잘못된 자본주의와 천민 자본주의 로까지, 물질 만능주의까지 이끌어가서 사람보다 혹은 일반적이고 기본적인 사람의 가치보다 자본이 우선시 되는 사회, 남을 밟아야지만 내가 일어날 수 있는 사회가 되어감에 그것이 잘못되었다는 인식조차 잃어버리고 사는 학생들이 부지기수라고 생각한다. 아니, 그런 생각을 할 겨를이나 시간을 주지 않고 시대에 적응하며 공부만 우선시 하고 있는, 그래서 학벌과 인맥, 혈연 등이 무시될 수 없는 개천에서 용이 나올 수 없는 사회, 대기업의 횡포로 중소기업과 하청업체, 그리고 소업체들은 눌려 사는 사회의 모습 속에서 우리는 사회 전반적으로 잘못되어 있는 구조에 대한 개혁의 행동이 필요하다. 물론 이런 체제로 분명히 이익을 얻는 사람들은 변화를 두려워하고 싫어할 것이지만 공존과 정의, 그리고 자유와 평등이라는 문제 앞에서 우리는 한번 진지하게 생각해 보아야 한다. 안되더라도 거대한 잘못이 있다면 계란으로 바위를 칠 수 있는 사회가 되기를 소망해본다.
세 번째로 듣기만 해도 설레고 즐겁고 사람을 행복하게 만드는 사랑이다. 사랑에는 분명히 사람을 움직이게 하는, 혹은 감동시키게 하는 강력한 힘이 존재한다. 또한 사랑에는 많은 종류의 사랑이 있다. 부모의 사랑, 형제의 사랑, 부부의 사랑 등등 말이다. 또한 행복을 이야기 할 때, 반드시 사랑이 빠지지 않는 것을 볼 수 있다. 사람은 보다 많은 사랑을 다른 존재에게 갈구하고 그것이 채워지지 않거나 원하는 만큼의 양이 얻어지지 않았을 때, 불안해하고 불행한 것을 느낀다. 요즘 시대는 사랑이 식어가는 세대라고 말한다. 물질은 풍요하고 과학은 발달했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옛날보다 현재를 더 불행하게 느끼는 사람이 더 많다는 연구결과는 우리가 쉽게 들을 수 있는 이야기이다. 물질주의와 개인주의의 발달로 인하여 인간 존재 본연의 가치가 점점 수치화 계량화 되고, 서로에 대한 관심과 애정이 줄어들고 있다. 자살이 증가하고 우울증이 늘어나고 있으며 부부싸움이나 부모와 자녀 간의 관계의 문제도 점점 늘어나고 있는 추세이다. 왜? 일차적으로 서로 간의 이해가 부족해서이다. 그렇다면 서로 간의 이해는 어디서 오는가? 어떻게 가능한가? 생각해 보았을 때, 그것은 관심의 부족이고 결국은 사랑의 부족이라는 결과까지 다가갈 수 있다고 생각한다. 사랑은 관계를 회복시키며 굳건하게 하는 능력이 있다. 이 세상에서 끊을 수 없다는 부모와 자식 간의 관계는 부모의 헌신적인, 생명을 다하는 사랑이 있기에 유지되며 그 사랑이 자녀들을 성장시킨다고 생각한다. 또한 사랑은 반드시 생각이나 이념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결국 표현으로까지 이어지게 된다. 그것이 말을 통해서든지 혹은 구체적인 행동으로 나타나든지 사람마다 방법은 다를 수 있지만 사랑하게 되면 보고 싶고 서로를 위해 주고 싶고 상대방을 향한 배려의 마음이 지속되고 분출되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즉 상대를 향하여 헌신적으로 배려할 수 있는 마음의 그릇의 크기가 허락된다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 특별히 하나님을 생각해보면 하나님의 사랑은 측량할 수 없는 광대하고 위대하신 사랑이다. 인간을 사랑하셔서 자녀 삼기 위하여, 그 형상을 다시 회복시키시기 위하여 아들 예수님을 이 땅에 내려 보내셔서 십자가에 못 박아 죽게 할 만큼 우리를 사랑하셨다는 사실이 우리는 감격케 하고 우리의 인생을 그분께 헌신할 수 있도록 만드는 원동력이다. 또한 우리와 함께 하시기를 원하시기 때문에 연약함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사용하신다는 사실이 사역자에게는 큰 기쁨이라고 할 수 있다. 인간을 향한 아가페적인 사랑으로 인하여서 우리의 삶이 결국 하나님 안에서 회보되고 그 회복을 나에게서만 끝내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까지 전하는 것, 그것을 말로만이 아닌 삶으로 보여주는 것이 사역자의 본분이자 의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하나님이 위대한 것은 우리를 어느 때나 거부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받아주신다는 사실이다. 인간을 한번 생각해보자. 인간은 철저하게, 아주 철저하게 본인이 기준이 되는 사랑이다. 이것을 그나마 뛰어넘은 것이 부모가 자식을 향해 하는 사랑이지만 이것을 제외하고는 거의 대부분 자신이 사랑의 결정권자가 되려고 한다. 그래서 특별히 거절 받고 거부 받는 것에 대한 두려움을 가지고 있다. 설사 내가 그 사람이 좋더라도 거절당할 수 있는 여지나 거리가 있다면 표현하지 않고 마음에 담아두는 것도 그만큼 거부당하는 것에 대하여 분명한 두려움과 아픔을 의식하고 있다는 증거이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죄인 된 우리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이 세상 누구도 가끔은 부모님도 나 자신을 받아줄 수 없을 때마저도 하나님께서는 나를 향해 팔을 벌리시고 받아주실 준비가 항상 되어있다는 사랑의 자세가 우리를 새롭게 한다. 요즘 세상에는 고멜을 사랑한 호세아는 눈에 씻고 찾아보기 힘들다. 기독교인이라면 당연히 그런 사람이 되어야 됨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그런 사람들이 가끔씩 존재함에 신문에 나게 되고 우리들은 얼마나 연약한지 남이 주는 조그마한 상처에도 아파하고 미워하는 모습을 볼 수 있게 된다. 호세아를 향해 고멜을 사랑하라고 말씀하신 주님의 말씀을 생각해 볼 때, 우리는 고멜을 사랑할 수 없지만 하나님의 사랑이라면, 하나님께서 하신다면 설사 고멜이 아니더라도 더한 존재도 사랑할 수 있는 하나님의 은혜, 헤세드가 우리 삶에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마지막으로 아름다움에 대해 생각해 볼까 한다. 인간은 기본적으로 아름다움을 추구한다. 특별히 여자는 여자로 일평생 살아가는 동안 아름다움이라는 주제에 항상 관심을 가지고 살아가게 되며, 남자 또한 감각 중 시각에 약하기 때문에 아름다움 여자 앞에서 약한 모습을 보이게 된다. 특별히 생각해보고 싶은 것은 모든 사람이 똑같은 기준의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피카소의 그림을 보고 아름답다고 느끼는 사람이 있는가 반면에 아무 감흥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도 있다. 또 단어 중에 인위적인 아름다움과 자연적 아름다움 등 아름다움 안에서도 아름다움을 구분 짓는 무엇인가가 존재함을 우리는 느낄 수 있다. 또한 기독교인들은 하나님이 아름답다고 하는데 그 아름다움은 어떤 표현일까 구체적으로 생각해 보게 되었다. 아름다움이라는 단어가 구체적으로 어떠한 것을 지칭하거나 콕 집어내는 것은 아니지만 추상적으로 우리가 느끼는 어떠한 감정을 일컬어 아름다움이라고 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앞에서 언급한 신은 아름답고 정의도 아름답고 사랑도 아름답다. 하지만 각 단어마다의 아름다움은 조금씩 다르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 그렇다며 우리가 혹은 내가 추구하는 아름다움은 어떠한 아름다움인가 고민하게 되었다. 또한 아름다움의 단어가 이성이 아닌 감정에 기초하는 단어라고 한다면 이성적인 아름다움은 논리적 이성적으로 설명이 가능할까 하는 의문도 들게 된다.
‘종교, 철학, 사랑 그리고 예술을 관통하는 한 가지는 무엇일까?’라는 질문에 책에서는 우리 안의 영원성에 가까워지고, 그 절대가로 끊임없이 수렴되려는 것이라고 했다. 즉 절대자에게 우리 자신의 자리를 내어주는 것에 대한 자세임을 말하고 있는데 이 4가지 모두가 분리될 수 없는 불가분의 관계가 아닐까 생각해 본다. 혼합이 아니라 일정한 규칙과 거리를 가지고 있는, 때에 따라서는 가까워질 수도 멀어질 수도 있는 그러한 관계 말이다. 즉 절대로 동일한 것도 아니며 별개의 것도 아닌 각자의 개체성은 가지고 있지만 그것이 서로 밀고 당김 속에서 서로를 만들어 가는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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