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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돈내산 & 추천제품 리뷰
파리대왕(노벨문학상 수상작) 본문
저자 : 윌리엄 골딩
출판사 : 민음사
가격 : 8.500원
파리대왕은 윌리엄 골딩이 쓴 글로서 핵전쟁이 터지고 위기적 상황 속에서 영국 소년들(5세에서 12세 사이의 아이들)을 비행기로 안전 장소로 후송하는 공수 작전이 시작되는 상황에서 소설은 시작한다. 이 비행기는 적군의 요격을 받아 격추되고 소년들은 비상 탈출하여 태평양상에 무인도에 떨어지게 된다. 처음에는 가장 나이가 많은 열 두 살인 랠프를 지도자로 해서 규율을 만들고 조처 있게 행동하지만 시간이 감에 성가대의 연장자인 잭과 오두막을 짓자는 주장과 사냥을 강조하는 것 의견 사이에서 불일치로 대립을 이루게 된다. 그러면서 랠프의 지도력이 약화되면서 잭이 랠프를 옹호하는 돼지라는 별명의 아이의 안경을 한 알 깨뜨리고 랠프는 회의를 다시 소집하여 봉화의 관리 철저성과 함께 오두막의 건설성을 강조하나 이미 반목하고 있는, 잭을 우두머리로 하고 있는 한 사냥패들은 이에 반대한다. 이때까지는 소라를 가진 사람이 발언권을 가진다는 약속을 가졌었는데 이러한 약속조차 잭으로 인하여 무시되면서 꼬마 아이들이 괴상한 짐승을 보았다고 얘기를 하여서 랠프는 수색대를 조사해서 보내지만 정상에서 낙하산병들의 시신을 보고 질겁해 도망간다. 그리고 다음 회의에서 잭은 랠프와 다른 길을 걷기로 확정되고 서로 따로 살게 되면서 아이들 사이에서 갈등이 일어나지만 다들 사냥을 해서 고기를 주는 잭을 따르게 되는데 이러던 도중에 잭은 잔치를 열어서 랠프파를 초대하는데 사냥으로서의 승리를 자축하기 위해서 춤을 추기 시작하고 주문을 외는 도중 짐승의 정체가 시체임을 알려주기 위해 나타난 사이먼을 흥분한 김에 살해해 버리고 만다. 이러면서 랠프파의 아이들은 몇 명 남지 않게 되는데 잭은 불이 필요하기 때문에 랠프파의 돼지의 안경을 훔쳐가고 그래서 랠프파는 안경을 돌려달라고 가서 호소하지만 랠프와 잭은 다투게 되고 그동안 로저는 바위를 굴려서 돼지라는 별명을 가진 소년을 죽게 한다. 랠프는 도망쳐서 숨어버리다가 사냥패들의 수색에 죽을뻔한 고비를 여러 번 넘기고 가까스러 바닷가에 나왔을 때 연기를 보고 섬에 들린 영국 해군 장교의 구조를 받는 것으로 작품은 마치게 된다.
이 작품 속에서 처음 마음에 걸렸던 부분은 랠프와 잭과 사냥을 가서 넝쿨에 걸려있는 멧돼지를 죽이지 못하고 망설이는 장면이다. 단지 멧돼지 앞에서 칼을 들고 내려칠 준비만 하였지 내려치지는 못하는, 아직 인간적인 양심이 살아있는 그리고 규율을 깨지 않고 지키려는 잭을 보면서, 칼을 들어 내리쳐서 산 짐승의 살을 베는 것이 끔찍했기 때문에, 용솟음칠 피가 견디기 어려운 것이었기 때문에 내려치지 못하는 잭을 보면서 또 그것을 행하지 못했다고 옆에서 핀잔과 야박을 주지만 그 스스로도 장담할 수 없는 랠프를 보면서 과연 우리는 어디에 속하는가를 곰곰이 한번 생각해 보게 된다. 어떠한 일이 생겼을 때, 그것이 악이든 선이든 우리는 과연 어떤 자세를 취하고 있는가? 우리는 과연 랠프와 같은 사람인가 잭과 같은 사람인가 한번 생각해보게 되는 계기가 된다. 소설이 후반부로 치달으면 극명히 악과 타락, 그리고 어둠으로 묘사되는 잭이 아직까지는 두려움과 공포가 그의 양심을 살려주고 있다는 사실에 놀랍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안타깝기도 하다.
잠깐 인물에 대해 살펴보자면 랠프는 외관적으로 잘생기고 타고난 지도자로서 남을 이끌어갈 외부적인 조건은 다 갖춘 완벽해 보이는 사람이지만 잭과 같이 집요하고 냉정한 저항에 이성적으로 대처할 만한 냉혹함과 고집이 부족하다. 하지만 이 부족한 것을 아이들을 생각하는 양심이라는 것과 마음으로 감싸 안아 줄 수 있는 따뜻함을 지닌 즉 문명의 가치를 대체할 수 있는 사람으로 여길 수 있을 것이다. 그에 반하여 잭은 항상 검은 제복에 우울한 분위기와 그림자 및 어둠을 표현하면서 단지 연장자와 성가대 권위를 통해서 지도권을 요구하는 이분법적으로 보자면 흔히 악으로 표현되는 세력이며 또 피기라는 돼지라는 별명을 가진 소년은 랠프파의 아이로서 랠프의 두뇌를 담당하는, 흔히 우리가 현대에서 얘기하는 지식인으로 여길 수 있다.
즉 랠프와 잭의 대립은 어찌 보면 선(랠프)과 악(잭)의 대립, 이성과 야성, 또는 문명과 야만의 대립으로 여길 수 있다. 결국은 영국 장교를 만나서 끝이 났기에 어느 쪽이 승리했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또 영국 장교의 성인적인 사회가 의젓하고 능력 있고 올바르게 묘사되어 있지만 실제로는 섬 속에서와 같이 그들도 똑같은 악으로 얽혀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장교는 이제 아이들을 데리고 영국으로 데리고 가지만 영국으로 가는 배 안에서 섬과 같이 똑 같은 무자비한 방법으로 그 적을 사냥할 때는 누가 그들을 말릴 것인가? 생각해보면서 현대 법이 잘못 되었다면 그것을 누가 바로 잡을 것인가 생각해 보게 된다. 현대에는 정치인들이 욕을 많이 먹고 있다. 초등학생한테 꿈을 물어보면 옛날에는 “대통령이요.” 혹은 “장관이요.” 대답하는 아이들이 많았다지만 지금은 그런 아이들은 손에 꼽을 정도이고 현재 매스컴에서도 보도되는 정치의 모습은 부정과 부패가 대부분이다. 하지만 앉아서 욕을 하고 비판 하는 것은 세 살 먹은 어린 아이도 할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하고 그것을 실행에 옮기고 하나씩 개선해 가려는 노력을 보이는 것이 우리에게 필요할 것이다.
이는 잭과 랠프의 대조를 통해서 보여주는데 특히 작품 속에서 잭이 랠프를 습격하여 돼지라는 별명의 아이의 안경을 뺏어갔을 때, 그것을 찾아가는 돼지의 모습에서 잘 나타난다. 여기서 2가지를 볼 수 있었는데 잘못되었을 때, 약자임에도 불구하고 잘못될 것임을 앎에도 불구하고 가서 당당하게 말할 수 있는 용기도 있었지만 그것을 본인 입으로 다 얘기함에도 불구하고 돼지는 랠프에게 옆에 붙어있어 달라고 얘기하는 이중적인 모습이다. 어느 사회나 힘이 있는 자는 편히 살 수 있다는 것은 불변의 법칙이다. 있는 자가 더 누리고 그의 권리를 누릴 때, 심지어 현대 법이 정의하는 최소한의 남의 자유마저 침해하더라도(현대 법의 자유의 한계는 남에게 피해주지 않고 본인이 자유를 누렸을 때, 그 자유에 책임을 질 수 있는 한도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을 당당히 잘못되었다고 얘기하는 사람도 있지만 대부분 그렇게 하면 더 큰 피해가 돌아올까봐 참고 살아가는 사람이 많다. 이는 바보 같다 여길지 모르겠지만 몰라서 그럴 수도 있고 알면서도 그냥 잘못된 사회 관습에 괜히 나 하나가 대들어 봐야 변하는 것도 없고 서로 피곤해지니 그냥 살지 하시는 사람들도 있다. 하지만 이런 작은 아우성과 바른 소리가 모여서 올바른 사회를 만들어 나가고 지탱해 갈 수 있다고 할 때, 이 소설에서 결코 돼지라는 별명의 아이의 역할은 작은 역할이 아닐 것이다.
현대에서 지식인이라고 하면 먼저 깨어있고 사람들을 올바른 길로 이끌어 나가고 사회의 흐름을 알맞게 이끌어 나가야 할 책임이 있는 사람이다. 하지만 지식인의 삶은 결코 편하지 않다. 많은 보수가 있는 것도 아니고 때로는 아니 자주 본인의 목숨을 위협받기도 한다. 예를 들어 군사 정변 때, 즉 군정시절에는 올바른 소리 쓴 소리 한 사람들이 의문사 되고 실종된 사건들이 많았다. 또 세계 어느 역사를 보더라도 올바른 지식인들은 결코 알아주거나 인정받으면서 살아간 것이 손에 꼽을 정도이다. 다들 핍박과 환란과 슬픔의 역사를 가지고 살아가는 것이 지식인의 삶이라고 얘기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작품에서 돼지라는 별명을 가진 아이는 잘못된 것을 보고 가서 잘못되었다고 이러면 안 된다고 당당히 말하는 것을 보아 올바른 지식인의 길을 보여준다고는 생각하지만 말하면서도 선의 힘을 담당하는 랠프가 옆에서 떨어지는 것을 두려워하는 것을 보며 지식인의 한계를 볼 수 있다. 물론 사람이 생존의 본능에 대해서는 어느 누구보다 강하기 때문에 본인이 살고 싶다는 생각을 하고 그것을 행동하는데 있어서 누구도 감히 비난할 수는 없지만 소설에서나마 이렇게 표현해야 되었는가? 소설에서는 그냥 사극에서 나오는 것처럼 힘 없지만 잘못된 것은 잘못되었다고 그 스스로 믿는 바를 관철해서 당당히 얘기하는 케릭터로 그리면 안되었나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그리고 또 하나 생각해본 것이 옛날에는 고문이라는 것을 법적으로 허용했었다. 요즘에는 인도주의 차원이라는 것에서 사형제를 폐지하는 것에 대해서까지 논란을 겪고 있지만 어떠한 결과를 얻어내기 위해서 사람이 사람을 고문하고 괴롭히는 것이 허용되었던 사회에서조차도 그렇게 많이 충신들과 바른 소리를 하는 사람이 나왔는데 현재는 정치인부터 많은 사람들이 서로 언쟁만 벌이고 개인들의 밥그릇 싸움에 혈안이 되어있는 것을 보면서 왜 이 시대는 그런 바른 말 하는 사람들이 적은가? 생각해보게 된다. 물론 비평가나 문학작품가들 중에 언론의 자유화가 법적으로 정해지면서 많은 비평과 의견이 쏟아지고 있지만 정작 사회를 바꿀 만한 멘트와 의견을 개진해 주시는 분이 많지 않다. 또 있다고 해도 사회 통념인 회의주의와 나 하나가 해봐야 하는 작지만 강한 소리들이 적어지는 사회가 안타깝다. 우리는 과연 어떤 자세를 취해야만 하는걸까?
또 약간 머리가 이상해 보이고 혼자 생각에 잠기지만 괴물의 정체를 얘기하려다 죽은 사이먼은 현대 성자 및 예언자 혹은 순교자로 표현될 수 있다. 그리고 잭의 오른팔인 로저는 잭의 하수인으로서 머리가 아닌 몸으로 하는 일은 다 나가서 뛰는 체력중심의 고문담당자로서 현대 흔히 얘기하는 어둠의 세력의 행동파라고 표현될 수 있다. 어떤 일이든 어떠한 결과를 만들어 내기 위해서는 일정양의 희생을 요구한다. 예를 들어 공부를 잘하기 위해서는 그만큼의 시간을 투자해야 되고 어느 분야에 전문가가 되려면 남들과는 다른 각오로 남들이 잃지 않을 것을 잃어가면서 본인이 추구해야 되는 것을 얻어야 한다. 물론 사람들은 얻을 것은 얻고 잃는 것은 싫어하지만 성경 말씀에도 “뿌린 대로 거두리라.” 라는 말씀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위 글의 사이먼은 예언자 역할로서, 예언자 내지는 순교자는 미래를 예언하고 사람들에게 잘못된 것을 알려주는 어찌 보면 종교적 지식인이라고 할 수 있는데 단지 지식인보다는 한 차원 다르게 더 신과의 관계가 적립되어 있다는 전제가 있다는 것만 차이라고 볼 수 있다. 사이먼은 꼬마아이들이 보았던 그 공포적인 존재, 즉 귀신이 각 개개인 본인들 안에서 만들어진 것임을 알고 있었다. 여기서 또 한가지 생각해볼 수 있는데 파리대왕이라는 제목의 핵심적인 상징은 모든 상징이 그렇듯이 부분의 총화 이상의 것으로 나누어 볼 수 있는데 몇몇 요소는 분리해서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때 헤브루어의 베에제버브를 번역한 것으로 직역하면 <곤충의 왕>이라는 뜻이라고 합니다. 희랍어로 <악마>를 가리키는 이 신랄하고 암시적인 말은 잘못 의역된 말을 오역한 데서 나온 것이라고 지적된 바 있지만, 어쨌든 그 이름으로 미루어 보아 부패와 파괴와 타락과 히스테리와 공포에 몰두하며 따라서 작가의 주제에 들어맞는 그러한 악마(잭)를 가리킨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사람은 모두다 내면의 공포와 생각하기 싫어하는 것들을 버리지 못하고 마음 속에 담아두고 사는 경우가 많다. 즉 지성, 자아, 사회적 관습, 도덕률, 그리고 문명의 교리 자체도 작렬하고 제어할 수 없는 힘, 즉 <인간 내면의 잔혹함과 폐해>를 가리고 있는 겉치레에 지나지 않는다. 즉 여러 자유분방함 속에서 구제를 발견할 수 있다는 역설적인 결론이 도출되는 것이다. 이 사회도 조그마한 사건을 크게 부풀려서 점점 해결하기 힘들게 만드는 경우가 종종 있는데 꼭 사회가 아니더라도 삶을 살아가면서 어떠한 시련이 부딪혔을 때, 이를 해결하고 맞서기 보다는 돌아가고 피하려는 경우를 종종 볼 수 있다. 물론 사람이라면 몸과 마음이 편한 대로 따라가는 것이 본능이지만 이러한 것들은 세상을 살면서 어찌 보면 매일매일 겪는 작은 전투라고 비유할 수 있는데 이럴 때마다 피해 간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부분에서 매일매일 부딪히는 삶의 어려움과 고난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맞서서 내 안의 자신과 대화하고 나를 성장시킬 수 있는 계기로 삼아야 할 것이다.
또 사이먼이 죽은 돼지 머리와의 대화 장면이 나오는데 돼지머리가 <모든 것은 잘못 돌아가고 있어…… 반쯤 감은 눈은 어른 세계에 특유한 무한한 냉소주의로 몽롱하였다.> 라고 말한다. 이 때, 사이먼은 돼지머리와의 전갈 즉 돼지머리가 말한 인간의 피할 수 없는 인식에 대항해서 싸우기 시작하는데 그 인식이란 인간이 악을 행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니고 있으며 인간의 도덕 체계가 근본적으로 천박하다는 사실의 새로운 발견이다. 인간이 악을 행할 수 있다는 능력을 충분히 지니고 있다. 성경적으로 해석할 때, 하나님께서 에덴 동산을 창조하시고 아담과 하와를 만드시고 모든 것을 허락하시되 선악과는 허락하시지 않으셨는데 이는 하나님과 아담과의 계약이라고 할 수 있다. 흔히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하는 계약과는 여러모로 다른데 이유인즉 계약이란 상호 대등한 위치에서 서로 원하는 것이 있을 때, 서로 지킨다는 약속과 신뢰 안에서 이루어져야 되지만 하나님과 아담과의 계약은 하나님께서 월등히 높은 위치를 차지하고 계셨고 지켰을 시에는 복을 주시고 어길 시에는 벌을 주시는 일방적인 의무였기 때문이다. 이런 신과의 계약도 파기한 아담을 보았을 때, 이로 인하여 기독교적으로 본다면 사람은 원죄를 가지고 태어난다는, 아담의 죄를 그대로 이어가는 성악설의 시작이 되기도 한다. (아담의 죄의 전가의 법칙) 사람은 악한 행동을 할 수 있다고 보지만 근본적으로 인간의 도덕 체계가 근본적으로 천박하다는 사실에는 의문을 가질 수 있다. 인간이란 뜻을 한문적으로 풀이해보면 人間, 즉 사람 사이에서 부딪히면서 살아가는 사회를 말한다. 즉 태초에 인간이 살기 시작할 때부터 지금까지 사람들은 서로 살아가면서 공존하기 위해서 노력해 왔고 그 결과의 산물이 보이는 것으로는 현재 각 나라의 실정에 맞게 법으로 제정되었으며 보이지 않는 것으로는 규율과 도덕으로 제정되었다. 인간이 나약하다는 말에는 동의하고 또 유혹과 여러 가지 환경에 약하다는 것은 인정하지만 인류가 살아온 기간이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이 세월 속에서 부족하고 약함을 보완하기 위해서 노력해온 결과들을 단지 잘 흔들리고 넘어질 수 있다는 이유로 근본적으로 천박하다고 하는 것은 비약이라고 할 수 있다.
정신적인 입장에서 본다면 인간은 지구 역사를 통틀어 어떤 것보다도 고등적인 생물이라고 할 수 있다. 인간의 지식은 날이 감에 발전해 가고 있고 또 그런 지식들이 모여서 인류의 삶을 구성하는데 인간이 이루어놓은 도덕체계가 자체로 천박하다면 여태까지 인류가 이루어왔던 도덕의 기초를 부정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나름대로 인류는 여려가지 여건과 환경에 맞추어서 도덕체계를 발전시켜 왔다. 물론 관습과 윤리 중에서 잘못 된 것도 있는데 식인종의 풍습이라던가 사람이 죽을 때마다 여자 손가락 하나씩 잘라내는 원시인들의 일부 잘못된 윤리와 전통이 남아있긴 하지만 단지 이러한 성립 이유로 도덕체계가 천박하다면 작은 것으로 큰 것을 판단하는 확대 오류가 범해질 수 있고 인간의 윤리가 천박하다면 즉 그 윤리를 만든 인간이 천박할 수도 있다는 주장이 된다. 하지만 진리인 성경말씀에 근거한다면 진리이신 하나님께서 아버지라 부를 수 있는 권한을 믿는 자들에게 허락하셨고 이는 인간을 존귀한 자로 여기시겠다는 하나님의 언약이 들어가 있는 부분이기에 즉 성경을 근거하여 인간의 위치를 파악해 보았을 때, 인간은 존귀한 자임으로 천박하다는 소설의 말은 수긍하기 어렵다.
또 작품에서 살펴보면 소라, 연기, 안경과 같이 별로 비중을 차지하지 않는 것 같은 사물들이 기능적인 상징을 나타낸다는 것을 볼 수 있다. 가령 맨 처음 비상 착륙했을 때, 회의에 있어 발언권을 가질 수 있는 사람은 소라를 들고 얘기하는 사람이라고 정했을 그때, 이미 그 소라는 소라의 의미를 잃어버리고 회의진행에 있어 중요한 역할을 하고 그것을 소유하고 있는 랠프에게 의도하던 의도하지 않던 자연스럽게 어떠한 권위를 부여해 주고 있다는 것은 어떤 조직에서도 인간이 상징적 구속력에 의존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인간은 자유스러운 존재 같지만 언제 어디에서나 자유스럽지 못한 구속적인 존재이다. 학교에 있을 때는 학생으로서, 나가 있으면 최소한 누구 집 아들, 직장에 있으면 어디 과 사장 등으로 개인의 소속을 나타낸다. 또 역설적인 것은 개인이 자유를 요구하면서도 어디에 소속되지 못하면 소외감을 느끼면서 다시 그 소속하는 곳에 들어가고 싶어 한다는 것이다. 일생 동안 어디에 묶여 있느냐의 차이인데 그 구속 속에서도 자유 할 수 있는가 없는가에 대해서는 이 파리대왕을 보면서 한번 더 곰곰이 깊게 생각해 보게 된다.
마지막 부분에 랠프도 변해가는 자기 자신의 모습과 아이들의 모습에 두려워한다. 학교에서는 선생님께서 질문하면 양같이 네네 대답하던 아이들이 섬 안에서 규율 없이 하는 생활 속에 변해가는 모습을 보면서 어떠한 공동체가 한 개인을 변화시켜서 그 변화된 개인이 또다시 공동체를 변화시킬 수도 있다. 또 소라의 무시와 파괴는 합법성과 양식의 파기를 상징하는데 현재 이 사회를 지탱해 주고 있는 것은 외적으로는 가장 큰 것이 법이다. 이런 법이 파괴된다면 사회가 혼란스러워진다는 것은 불 보듯 뻔한 일이다. 이미 사회가 법을 기본통념으로 지탱하여 유지되고 있고 법이 사라진다면 개인을 강제할 공식적인 힘이 사라지기 때문에 오히려 동물의 세계와 같이 약육강식의 세계로, 즉 강자와 약자의 세계와 같은 청동기 철기 시대와 같은 상황이 연출될 수도 있다. 동물의 세계는 겉으로 보면 아름답지만 그 내면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생존을 위한 매일의 투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만들어진 규율에 대한 반항은 합법적인 반항이 아니라면 또는 잘못된 규율에 대한 반항이 아니라면 인정하는 것이 사회 유지에 발전일 것이다. 물론 이런 점을 보았을 때 “악법도 법이다.” 라고 하면서 나라에서 내린 독약을 마시고 죽은 소크라테스는 법의 지킴의 중요성을 나타낸 것이지 현대에 적용한다면 잘못된 법은 개정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그렇다면 “잘못된 법의 기준이 무엇이냐?” 를 문제로 제기할 수 있는데 일단 이 문제의 전제는 절대 객관적일 수 없다는 것을 전제로 해야 한다. 왜냐하면 양심이라는 것과 윤리라는 것 그리고 정신적인 것은 숫자로 매길 수 있는 것도 가시적인 것도 아니고 단지 인간의 통념을 기준으로 하기에 어떤 절대적인 기준이 존재할 수는 없지만 사회 통념상으로 여태까지 지켜왔을 때, 이것은 잘못되었다 하며 여러 번 제기를 받았거나 사람들에 의해서 개정 요구 내지는 이 법이 존재함으로서 오히려 사회 질서에 해가 된다 하는 경우는 과감히 잘못되었다고 할 수 있다.
또 안경은 봉화의 불을 만들어냄으로서 그들이 구조될 수 있다는 유일한 희망을 품게 한다는 점에서 생명근원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고 그런 안경을 통해 지식인의 역할을 하는 돼지라는 별명의 아이가 세상을 본다는 점에서 지식과 문명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안경이 부분적으로 망가지고 깨어지는 과정은 소년들에게 있어 문명의 점진적인 퇴조라고 볼 수 있는데 여기서 그러면 ‘무조건적인 문명의 점진적인 발전은 이로운가?’ 에 대하여 생각해 보게 된다. 문명의 발달, 과학의 발전이 현대 삶을 이룩하는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여건이라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며 현대를 지탱하는 기계와 모든 것들이 과학의 발전이 없었다면 불가능 했다고 말해도 틀리지 않을 정도 과학은 현대 생활의 기본이 된다. 하지만 무분별한 문명의 발달은 인간 그 자신만의 생활 영위로 그 결과는 지금 우리가 충분히 받고 있기에 지속가능한 발전에 대하여, 그리고 수정방안에 대하여 생각해 보아야 한다.
이 글 평가에 찾아보면 작가 윌리엄 골딩은 이 작품을 통해서 2가지를 묻는데 하나는 ‘내면화된 문명의 가치가 어느 정도의 견고성과 효용성을 가지고 있는가?’ 를 묻고 싶어한다. 이 작품에서는 드러나길 처음에는 동의의 관습을 서로 존중하고 따르다가 잭이 랠프와 반목하면서 슬슬 아이들이 타락하기 시작하면서 자진하여 문명겉치레를 던져버리고 그러면서 인간 본성을 어둠으로 파악하고 있다. 또 다른 하나는 ‘인간 본성의 결함에서 사회의 결함을 근원을 찾아라’ 하면서 사회는 개인 윤리 형태에 영향을 받지 정치체제에 영향을 받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내면화된 문명의 가치가 어디 정도의 견고성과 효용성을 가지고 있는가에 대해서는 저도 상황과 환경이 바뀐다면 그다지 큰 견고성과 효용성을 발휘하기 어려울 것이다. 사람은 적응력이 강한 동물이라고 하며 어디 가서도 어려운 상황에서도 잘 적응하고 살아간다고 하는데 파리대왕 작품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영국에 학생의 신분으로 있을 때는 정말 양 같이 순하고 말 잘 듣는 학생으로서 흠잡을 때 없는 아이들이었으나 규칙이 없는 무관례의 땅에 떨어지자 그들이 지키고 배웠던 관습을 처음에는 유지하긴 하지만 소설 속에서 그들 스스로가 그것들을 벗어 던져버리는 모습을 보게 된다. 그것은 소설 속에서만 이루어 지는 것이 아니고 현실 속에서도 충분히 이루어 질 수 있는 일이다. 사람은 내면에 기본적으로 숨은 사나움이 있으며 아무리 선하고 착한 사람도 마음 속에 자기 자신도 모르는 난폭함과 야성이 있다. 이는 심리학적으로 ‘보이지 않는 이성’ 이라고 하는데 일단 규칙과 법이 있는 곳에서는 그것을 지키고 사는 것이 여러모로 유리하다고 판단 할 수도 있고 그것이 몸에 배어있기 때문에 편해서 지키고 살아갈 수 있지만 남의 시선이 사라지고 본인의 살던 세계와 엉뚱한 곳에 떨어지게 된다면 흔히 자기 머리 속에 가지고 있던 생각들과 이념 관념들이 적용되지 않는 카오스적인 세계에 빠지게 될 수 있다. 이를 잘 극복해도 적응해서 생활하는데 어느 정도의 시간의 대가를 요구하는데 적응을 하지 못한다면 관념의 무질서 속에서 내면화된 질서의 견고성과 효용성이 삶을 지탱해 주는 것에 큰 기대를 하기 어려울 수 있다.
또 하나는 사회는 개인 윤리 형태에 영향을 받지 정치체제 영향을 받지 않는다 라고 했는데 저는 이 주장이 반은 옳지만 반은 옳지 않을 수 있다. 즉 사회는 개인 윤리 형태에 영향을 받고 또 정치체제에도 영향을 받으며 일단 두 전제 다 개인 윤리 형태에 영향을 받는다는 전제하에 설명한다면 정치를 하는데 있어 국가의 구성요소는 크게 국민 주권 영토 3가지로 나누어 질 수 있다. 국가는 즉 인간이 이루고 가는 사회라고 정의해도 크게 벗어나는 말이 아니기 때문에 정치체제를 구성하고 결정하는 국민의 경우에 있어 사회가 정치체제에 영향을 받지 아니한다는 말은 정확히 옳지는 않다.
이 소설에서는 비판의 여지도 적지 않게 있습니다. 소설이 너무 교묘하게 짜여져 있어서 속임수라는 느낌을 주기도 하고 과도하게 단순화되어 있어서 오도적이라는 것이다. 또 작품성에 있어서 어른들이 전혀 등장하지 않고 마지막 한 부분적으로 나온다는 것과 남성만 출연함으로써, 즉 성의 동력학을 배제함으로써 인간의 총체성에 대한 중대한 왜곡을 안고 있기도 하다. 특히 2가지 즉 남성만 출연한다는 것과 어른들이 등장하지 않는다는 것은 소설이 한쪽으로 편파적으로 흘러갈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암시하며 물론 정밀하게 생각하고 정리하여서 나름대로 결론 지어서 쓸 수도 있지만 여러 여건 중에 평가한 것과 한가지만을 놓고 평가한 것에 대해서는 아무래도 후자 쪽이 전자에 비하여 여러 가지로 쏠릴 수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이 소설 전에 나온 ‘산호섬’이라는 소설은 똑같이 랠프 잭 피터킨이라는 세 소년이 서로 도우며 태평양에 한 섬에 낙원을 건설한다는 이야기이다. 이는 같은 사건을 가지고도 여러가지로 해석할 수 있다는 결론이 내려진다. 소설 속에서도 랠프가 “위와 아래에서 비치는 경우 얼굴이 다르게 보이면 얼굴은 무엇일까? 그렇다면 사물이란 무엇일까?” 를 질문하는 것이 나오는데 이는 매일 보는 사물이 언젠가 갑자기 낯설고 이상하게 느껴질 때, 즉 하이데거가 얘기한 자기 보존의 욕망의 예를 들 수 있다. 예를 들어 사람들이 매일 입는 옷이 이게 왜 옷일까? 의문을 가질 수 있는데 그때 타자를 알고 싶은 본인의 욕망이 내가 원하는 타자를 알게 할 수는 있지만 타자를 확보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데카르트는 모든 것을 의심해보는 것, 즉 방법적 회의를 관철시켜 보기도 하는 노력을 기울이는데 즉 하나의 절대적인 시각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사물을 관철할 때는 단 하나의 진리가 있더라도 그것을 다른 시각으로 보려는 노력이 이루어져야 됨의 필요성을 언급한다.
이 작품 속에서 이런 대목이 있습니다. “랠프는 몸부림치면서 목메어 울었다. 이 섬에 와서 처음으로 울음을 터뜨린 것이었다. 온몸을 비트는 듯한 크나큰 슬픔의 발작에 몸을 맡기고 그는 울었다. 섬은 불길에 싸여 엉망의 되고 검은 연기 아래서 그의 울음소리는 높아져 갔다. 슬픔에 감염되어 다른 소년들도 몸을 떨며 흐느꼈다. 그 소년들의 한복판에서 추저분한 몸뚱이와 헝클어진 머리에 코를 흘리며, 랠프는 잃어버린 천진성과 인간 본성의 어둠과 돼지라고 하는 진실하고 지혜롭던 친구의 추락사가 슬퍼서 마구 울었다.” 작품 속에서 대장으로 꼽히던 한 열 두살 아이의 울음은 개인의 울음이 아닌 사회를 위한 울음인 것 이다. 하지만 사회의 소리가 너무 크기에 이 랠프라는 강하게 묘사되지만 아주 연약한 이 아이의 울음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또 잃어버린 천진성과 인간 본성의 어둠 그리고 지혜롭던 친구에 대한 울음은 본인이 어찌 할 수 없는 무력감에 대한 자괴, 본인과 사회에 대한 분노 그리고 인간의 본성에 대한 회의감 등을 여러모로 복잡하게 나타내 준 구절일 것이다.
소설 속에서 아이들이 잭의 무리 밑으로 들어가 사냥을 시작하고 난폭함으로 변해갈 때, 그들이 한 행동 중 하나가 얼굴에 분을 칠하는 것이다. 사냥을 하는데 있어서 처음에는 이유가 변장술 즉 주변 환경과 비슷해야 사냥하기 쉽다고 시작하지만 이 행동은 점차 본인 내부에 있는 야만성을 풀어주는 결과를 불러들이게 된다. 이런 야만성이 점점 심해지다가 결국에는 파리대왕이라는 공포는 내부에 있는 것임을 알려주러 내려오는 사이먼을 먹잇감으로 여겨 죽이고 돼지라고 별명 불리우는 아이까지 돌로 죽이는 사태에 이르게 되어버리는데 이 부분을 보면서 살면서 우리는 얼마나 많은 가면을 쓰고 살아가나 혹은 얼마나 많은 잔혹성과 야만성이 제 내면 속에 있나 생각해보게 된다. 우리는 흔히 남들에게 보이기 위한 부분들이 참 많다. 좋은 모습만 보이기 위해 노력하고 그런 모습만을 또 봐주길 원하고……. 그렇기에 우리 내면 안에 있는 참 모습을 보기 위한 노력과 그런 모습이 있는지조차 잊어버리고 살아갈 때가 많은데 파리대왕은 그런 제 진정한 속의 내면 모습을 한번 바라보게 만들고 깊이 생각해 보게 만든 책이라고 생각한다.
마지막으로 랠프와 돼지라는 별명 불리는 아이 간의 대화 속에서 ‘어른이란 무엇일까?’ 하고 물어보는 대목이 나온다. 그래서 이들은 여러가지 예를 들면서 결론 내리길 사리가 밝은 사람이라고 결론을 내리는데 사리가 밝은 사람은 대체로 어른이 맞긴 하다. 하지만 단지 사리가 밝다고 해서 어른이라고 할 수는 없다. 보통 성인의 기준은 일반적으로 신체 나이를 기준으로 여겨 결정된 사항이지만 어른이라는 것은 육체적 성숙과 정신적 성숙이 동시에 같이 이루어져야 된다. 즉 어느 정도 육체적 성숙을 거쳤기 때문에 그 거친만큼의 기간 동안 겪은 경험들과 들은 이야기, 또 고통들과 기쁨 슬픔 등의 여러 감정과 지성 그리고 영성을 통해 배우고 익힌 것들을 정신적으로 잘 정리하여서 사회생활 하는데 있어 덜 성숙한 사람들을 이끌어 줄 수 있는 역할을 하는 것이 성인일 것이다. 보통 대한민국에서는 대학생부터 성인이라고 여기는데 이는 자기 일에 책임을 질 줄 아는 나이라고 여기기 때문이고 그만큼 합당한 대우와 함께 자유를 지급해 준다. 하지만 종종 지급해주는 자유를 고등학교 때까지 너무 억눌려 있던 관계로 주어진 자유가 자유인지 모르고 어떻게 사용하는지 모르는 사태가 발생하기도 한다. 파리대왕에서 아이들에게 주어진 지킬 수 없는, 절제 없는 자에게 주어진 자유가 얼마나 무서운 것이며 인간을 얼마나 비참하고 황폐하게 만들 수 있는가 보여주는 작품이지 않을까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