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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리와 무한 본문
저자 : 엠마누엘 레비나스
출판사 : 다산글방
가격 : 6.000원
윤리와 무한, 처음 들으면 일단 단어가 상당히 포괄적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윤리라는 것은 인류가 존재하면서 여태까지 논의되고 계속 토론되는 주제이며 절대적인 것이 아니고 상황과 시대에 따라서 달라질 수 있는 개념이다. 또 무한이란 유한의 반의어로서 정할 수 없는 어떠한 양과 크기를 말한다고 할 수 있다. 엠마누엘 레비나스가 저서한 윤리와 무한-필립과의 대화라는 책은 총 10과로 이루어져 있는데 한과씩 나누어서 언급해 보려 한다.
1과는 제목은 성서와 철학으로서 크게 다루고 있다. 사건은 충격이나 더듬거림으로 시작한다고 얘기하면서 성서뿐만이 아니라 크게 문학이라는 것은 현실과 정치를 넘어서 자신이 집착한 것을 벗어나는 방법이며 인위적인 것이 아니고 자연적이라고 주장한다. 물론 문학을 통해서 정치 현실을 벗어나서 이상 세계에 다다를 수도 있고 자신을 벗어나는 방법 중에 하나가 될 수도 있다. 어쨌든 문학활동을 한다는 전제 자체는 자연적인 것이 아니고 인위적인 것이다. 사람의 본능 중에 앎의 본능이 있지만 그 본능 자체가 자연적인 것이지 그 앎을 채우기 위해서 이루어지는 행동은 인간의 선택하고 행해 나가는 과정이다. 그렇기에 인위적인 것을 배제한다는 것은 과정 자체를 무시하고 써 내려간 과학법칙과 같다고 생각할 수 있겠다. 또 성서는 책 중의 책이라고 할 수 있으며 철학의 밑바탕에 있는 것들은 성서에서 모두 찾을 수 있다. 그리고 성경 속에 있는 성령은 글귀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우리의 삶 즉 글귀 너머에 존재한다는 것이다. 베르그송의 지속이론에서 물리적 차원에서의 시간은 파생된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하지만 물론 시간 자체는 파생된 것일 수 있으나 그 안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행동들 자체까지 가치를 낮게 평가하는 것은 인간 자체에 대해서 크게 가치를 두지 않는 행동이라고 볼 수 있다. 물론 시간을 살아가는 것들에는 모든 동물과 식물이 있고 거기서 꼭 주인공이 사람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하나님의 형상을 닮았고 생명을 다스려라(섬겨라)라는 명령을 받은 객체로서 나름대로 지구에서는 중요한 동물이라고 할 수 있겠다. 또 가치를 평가하고 부여할 수 있는 것을 할 수 있는 존재는 인간밖에 없기 때문에 시간 자체를 객관적으로 보는 관점은 필요할 수 있으나 그 시간 안에 속해있는 생명체까지 객관적으로 낮게 평가하는 것은 옳지 않다. 그리고 철학이란 굳어진 이론체계 안에서 갇혀 있지 않으며 혼란스런 직관에 의존 하지도 않고 나아갈 수 있는 가능성을 지닌 학문이라고 할 수 있다. 즉 철학이란 세상이라는 곳에서 진리를 위한 외줄타기를 하고 있는 학문이다. 하지만 세상에서 잘못된 것에 속하지 않는다고 세상과 단절되어서 나아가는 것은 잘못된 자세일 것이다. 연구하는 것은 필요하지만 그 연구의 목적이 진리 추구 및 세상을 바르고 아름답게 하는 것에 우선순위가 있기 때문에 세상에서 잘못된 것이 있다면 당당히 잘못되었다고 얘기할 수 있는 자세도 물론 철학자들에게 필요하다. 그러면서 조심해야 되는 것이 가치차원은 사물 존재에 있는 것이 아니고 의식에 있다고 생각할 수 있는데 사물 자체가 존재함으로 가질 수 있는 가치가 있다는 점이다. 거의 모든 나라의 법에도 인간 자체가 고유하고 가치가 있다고 천명하고 있으며 생명이라는 것이 존재하므로 그 가치가 발하고 있다. 또 앎에 있는 것이 아니고 환원할 수 없는 지향성에 가치가 있다고 하지만 앎 자체도 어느 정도 기반이 없이는 환원할 수 없는 지향성 자체에 다다를 수도 없다. 즉 궁극적인 목적이 되어서는 안되지만 앎 자체를 또 무시하고 학문을 해서도 안될 것이다.
2과에서는 하이데거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다. 하이데거 하면 20세기의 거장이라고 할 수 있으며 현대 철학의 토대를 세웠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철학자이다. 이에 대해 레비나스는 일단 존재라는 것의 표현은 명사적인 표현일지 모르지만 뜻 자체는 동사적인 표현이라고 주장한다. 즉 있음이라는 개념 자체는 명사적인 것으로 가둘 수 없는 것으로 존재론에 대해 언급하는데 존재론이란 무엇, 존재하는 것, 다시 말해 있는 것을 탐구하는 것이 아닌 있는 것의 본질 및 있는 것들 사이의 관계를 탐구하는 분야와는 다른 있음 자체를 파헤치는 학문이라고 정의한다. 하지만 존재를 탐구하는 것 자체 또한 존재론에 포함되어야 한다. 일단 무엇이 있는지를 알고 그 있는 것을 통해서 가지치기식을 통해서 어떻게 발달해 나아가는가 볼 수 있기 때문에 이 있는 것을 탐구하는 것은 존재론을 시작할 수 있는 거점을 만들어 주는 그 자체일 수 있다. 예를 들어 마음에 상태에 불안감이 있으면 그것은 불안이라는 상태에 대한 어떤 가시적인 대상이 아니지만 문제는 불안한 것이 아니고 그 불안 자체의 대상 자체가 없다는 것이 중요한 문제라는 것이다. 그러면서 ‘한 말’은 ‘하는 말’보다 중요하지 않다고 언급하는데 한 말의 중요성은 말을 걸고 있었다는 사실에 있는 것이지 내용에 있지 않다고 주장하며 크게 보면 한 말은 과거로 치부할 수 있을 것이고 하는 말은 현재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과거와 현재 미래 3가지를 놓고 가치를 100점으로 나누어 보라면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누구도 과거와 현재 자체를 무시할 수는 없다. 즉 과거와 현재가 소통하여서 잘못된 것은 시정하고 잘한 것은 발전시켜서 미래를 만들어 가기 때문이다. 즉 과거와 현재가 하나될 수 있을 때 좀 더 올바른 미래를 만들 수 있다는 것에는 사실이다. 이와 같이 ‘한 말’과 ‘하는 말’ 에는 어느 누가 더 중요하다고 언급하기 보다는 양쪽 다 같은 가치를 가지고 있으며 단지 가치에 대한 차별이 아닌 차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면서 이 책에서는 하이데거의 업적으로 과거의 철학자들이 지양되었으나 역설적으로 보존되면서 사라진 것을 현재와 소통시켰다고 언급한다. 하지만 하이데거처럼 드러난 학자들 중에서 공식적으로 어떠한 계기를 통해서 드러낸 것은 처음일 수 있으나 그 전에도 사라진 과거와 현재의 소통을 얘기한 경우가 많을 것이다. 예를 들어 소크라테스의 ‘악법도 법이다.’ 에서는 법이라는 것은 과거에 만들어 진 것이며 시정되고 개헌될 수도 있지만 그 과거의 것을 현재 적용시켜서 가지고 나아갈 수 있는, 목숨을 건 용기를 보여준 사례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서 존재와 시간에 대해서 언급하는데 존재하는 것은 일단 시간이라는 개념 안에서 벗어날 수는 없지만 즉 시간과는 무관하게 갈 수는 없지만 그 시간 안에서 객관적으로 삶 자체가 뚜렷이 나아갈 수 있다는 것은 자연스럽게 되는 것이 아니고 노력과 피가 필요했고 또 그것을 지키는데도 적지 않은 노력이 필요하다. 즉 있는 것의 성질을 보는 것보다는 상태에 가치와 초점을 더 맞추어서 여태까지 발전해 왔다고 할 수 있다.
3과에서는 그저 있음이라는 제목을 가지고 언급하는데 일단 그저 있음이라는 단어를 들었을 때, 데카르트의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라는 어구가 떠오른다. 지금 당장 귀를 막으면 텅 빈 곳에 무엇이 꽉 차는 듯하고 적막함이 웅웅 하고 소리를 내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즉 완전한 텅 빈 것 가운데, 창조 전에 그저 있음이 있었다고 생각한다. 이것을 통해서 지금 아무 것도 없다고 단지 무(無)라고 칭할 수는 없을 것이다. 즉 현재적 무는 가능할지 모르나 형이상학적인 실제적 무는 불가능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면서 지금 그럼 존재하는 것도 이것이 정말 존재하는 것인가 하고 의문을 가질 수 있다. 즉 내가 칭하고 있는 것들, 예를 들어서 연필 필통 옷 들이 이것이 정말 연필이고 필통이고 옷인가 의심해 볼 수 있다. 이것은 소쉬르의 언어학적인 개념으로도 설명할 수 있겠지만 우리가 통칭 부르는 물체에 대한 호칭은 그 특징을 가지고 했다기 보다는 단지 그것을 인지하는 한가지 방법이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비가시적인 것은 존재하지 않지만 예를 들어 희망 기쁨 등은 우리가 인지할 수 있는 한가지 방법으로서 존재하는 것이지 그 언어가 그것을 절대적으로 표현해 주는 수단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존재가 존재이기를 벗어나고 고정되길 벗어나는, 그러면서 시공간을 거부하는 것은 필요악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일단 존재가 존재이기를 벗어나려면 존재 자체가 어떤 존재이고 어디에 속한 지를 알아야 한다. 그 조건이 충족되면 그 존재가 벗어나기를 노력하려면 각성이라는 것이 필요할 것이다. 각성을 하기 위해서는 많은 깨어짐과 고뇌 고난, 그리고 개인적인 성숙이 필요할 것이다. 그것은 삶을 통해서, 또 본인은 의도하지 않지만 어떠한 계기를 통해서 이루어 질 수 있다. 새가 알에서 깨어날 때, 사람이 어머니의 자궁을 통해서 탄생될 때, 그 새끼와 아이가 겪는 고통은 본인의 세상을 깨고 나오는 고통이라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고통이다. 의사들은 아이가 출산할 때 느끼는 고통은 어머니가 느끼는 고통과 거의 같다고 한다. 즉 그만큼 다른 세상에 나오기가, 각성이 힘들지만 그런 각성을 통해서 본인이 또 다른 어떤 존재인지 지각하고 알아갈 수 있다는 기회가 될 수 있기 때문에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다. 그리고 한번 깨어진 사고에 대해서는 이제 그 전보다는 나름대로 정리와 발전이 가능하고 발전시키는데 있어서 원동력으로 삼을 수 있지만 그 과정 속에서 이루어지는 시공간에 대한 거부와 본인의 본인 됨의 거부 같은 과정이 지속된다면 본인만의 세상에 빠져서 흔히 얘기하는 자폐로 이루어 질 수 있다. 사람이란 공동체 생활을 기본으로 하는, 혼자서는 살아갈 수 없는 존재이다. 그렇기에 더 큰 세상과 더 큰 사고를 가지기 위해서 그런 고난을 계속 지속시키는 것은 위험부담이 크다고 할 수 있다. 물론 그런 절박성과 위험성이 더 큰 발전의 기회가 될 수도 있겠지만 우선되어야 하는 것은 철학이라는 주체는 사람이고 사람을 통해 세상을 변화시키고 발전시키는 기본적인 학문이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그리고 그저 있음을 통해서 나 자신을 볼 수 있는 시간과 방법도 알아가야 될 것이다. 그러면서 존재와 존재자를 나눌 수 있겠는데 존재는 가공되지 않은 광석에 비유할 수 있을 것이고 존재자라는 것은 루이 14세의 태양의 눈물과 같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답다는 목걸이에 비유할 수 있을 것이다. 즉 존재와 존재자라는 단어는 한글자 차이지만 그 단어들이 가지고 함축하는 뜻은 하늘과 땅 차이임을 알 수 있니다.
4과에서는 존재는 홀로 있음이다 라는 제목을 가지고 시작한다. 레비나스는 하이데거의 존재에 대하여 비판할 때 관계성이 빠진 것을 비판한다. 즉 레비나스의 홀로 있음은 우리가 생각하는 정말 객체 하나가 아니라 관계에 대해 언급하는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면서 시간이란 혼자 떨어져 있는 한 주체의 사실이 아니라 한 주체와 남과의 관계임을 보이는 도구라고 정리한다. 그래서 레비나스 식으로는 ‘존재는 시간이 아니다’ 도 맞는 말이 되고 ‘존재는 시간이다.’ 라는 말도 맞는 말이 되는 역설적인 상황이 이루어진다. 즉 앎이란 혼자 하는 것이 아니라 인식 주체와 인식 객체의 상호작용의 이해에 의해 이루어지는 과정일 수 있다. 앎의 과정 중 하나인 공부가 책을 보면서 혼자 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공부도 어떠한 저자가 의도를 가지고 전하고 싶은 내용을 어떠한 사람에게 대면만 하지 않을 뿐이지 인식 주체와 인식 객체의 자격으로서 만나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즉 인간의 생활이란 크게 보면 모든 활동들이 의도하지는 않지만 앎의 과정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일을 하든 친구를 만나든 심지어는 밥을 먹더라도 그것들은 모두 어떠한 대상들과 소통하는 과정이라고 볼 수 있으며 공식화 시켜 본다면 홀로 있음이란 존재이고 존재란 사귐이라고 할 수 있다(존재=홀로 있음=사귐). 좀 더 구체적으로 본다면 사귐이란 있음에서 벗어나는 방식이고 홀로 있음에서 주의해야 할 것은 ‘홀로 있음’에서 벗어나는 것보다 ‘있음’에서 벗어날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 된다는 것이다. 홀로라는 것을 언어 그대로 해석하면 혼자이지만 여기서 의미하는 홀로라는 것은 혼자가 아니고 공동체 속에서의 홀로를 의미하기 때문에 있음이라는 것에 더 의미를 둘 수 있다. 그러면서 여기서 홀로와 상대를 알아가는 과정인 앎이라는 것은 동화작용으로서 즉 이해를 통해서 손에 넣은 모든 것과 엉켜 넣은 총체적인 것이다. 하지만 앎이라는 것이 여기에서만 끝나는 것이 아니고 그것을 적용시키는 곳까지 나아가야 한다. 흔히 우리가 살면서 지식과 지혜를 언급하고는 하는데 지식이란 단지 아는 것에 그치는 것을 의미하고 지식을 얻을 수 있는 방법에는 여러 가지 다양하고 본인의 의지만 있다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있다. 하지만 지혜라는 것은 일단 하나님께서 허락해 주셔야 하고 지식을 바탕으로 본인이 살아가는 사회에서 적용하고 상황에 맞추어서 헤쳐 나가는 방법을 의미하기에 지식보다 한 단계 더 어려운 일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것처럼 앎이 앎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고 그 앎을 삶에서 적용시킬 수 있어야 하는데 예를 들어 상대를 알아가는 앎이 상대를 아는 것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고 그 상대를 앎으로서 내가 어떤 사람인지 알고 그 사람에게 부족한 것은 내가 채워 줄 수 있고 그 부족한 것을 닮지 않으며 그 사람의 장점은 배워서 내가 익힐 수 있도록 하는 노력이 수반되어야 한다. 또 ‘군중 속의 고독’ 이라는 말을 내 삶에서 적용시켜서 그런 고독도 기꺼이 즐기고 겸허히 받아들일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사람들은 사람이 많은 곳과 붐비는 곳이 생기 있고 활기차다고 좋아하지만 조용하고 한적하고 때론 적막하여 우울해질 정도의 위치에서도 철저히 홀로라는 것을 생각할 줄 알고 그런 상황조차도 하이데거의 홀로라고 느낄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고독(孤獨)이라는 단어를 보면 외로울 고에 홀로 독이지만 진정으로 고독한 것은 외롭고 홀로인 것이 아니고 외롭고 고독한 것 자체도 같이 수반하고 동반자 삼을 수 있는 그런 사람이 아닐까 생각해 볼 수 있다.
5과에서는 남녀의 사랑과 친자관계라는 주제로 언급하고 있다. 나가 아닌 타인과 있어서는 즉 존재하는 것들 사이에서는 타자성이 필요하다. 단 그 타자성을 나는 나로 여기는 것과 같이 남을 여기는 주관적이면서 객관적인 요소가 모두 들어가야 할 것이다. 내가 나로 볼 때는 아무래도 객관적인 위치보다 주관적인 요소를 많이 가지고 있을 수밖에 없는데 즉 나를 보는 자아성에서는 객관적인 위치에 서는 것을, 남을 보고 연결시켜주는 타자성은 그 타자 자체를 여기는 객관성이 반드시 기본적으로 수반되어야 한다. 그러면서 책에서는 남녀간의 사랑을 이끄는 것은 상대방의 다른 성질이 아니라 상대방의 타자성이라고 언급하는데 타자성이 사랑을 이끄는 것이 아니라 그 존재 자체가 소중하여서 사랑이라는 감정을 이끈다고 생각할 수 있다. 어찌 보면 감정적이라고 언급될 지도 모르겠지만 생명이란 존재는 자체가 가치를 지니고 있다. 그리고 본인이 원하는 어떠한 상(像)이 있기 때문에 그 상에 대체적으로 맞고 서로에 대해서 사고가 일치한다면 사랑이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타자성에 의한 사랑도 불가능 한 것이 아니고 어느 정도 가능하지만 단지 타자성이라는 요인을 가지고 사랑한다고 언급하기에는 부족하다. 그리고 앞에서 언급한 홀로 있음이라는 것을 통해서 있음에서 탈피할 때 타자성과 의사소통이 가능하다는 것은 염두해 두어야 한다. 또 남녀 간의 차이가 있는데 그들은 서로 보완하는 것이 아닌 이유는 보완이란 벌써 어떤 하나가 이미 있다는 것을 전제로 얘기하는 것이다. 하지만 벌써 객체가 남녀라는 둘이기 때문에 맞지 않을 수 있고 종교적으로 볼 때에는 특히 기독교 적으로 본다면 남녀를 떠나서 하나님 안에서는 벌써 한 공동체이다. 그리고 말씀에도 남녀가 하나 되어 서로 채워주라는 말씀이 있고 협력하여서 선을 이루라는 말씀도 있기 때문에 서로 보충해주는 것이 옳을 수 있다. 이미 하나가 있다는 것은 하나님이라는 분이 존재한다는 것을 기초로 하고 또 남녀가 서로 하나가 되어서 맞추어 가려는 노력은 당연히 필요할 것이다. 그리고 남녀가 접촉할 때 서로 만지는 행위에 대해 언급하는데 그때 어떠한, 무엇을 찾고 잇는지 알지 못하고 즉 그냥 찾는다는 노력 그 사실 자체만 존재한다. 즉 서로를 알아간다기 보다는 단지 그 노력 자체만이 담겨진 한 행동으로 볼 수 있다. 또 이 장에서 언급하고 있는 친자관계는 자식이란 부부의 사랑의 시간성과 교통의 결과이다. 즉 자식이란 또 다른 내가 아닌 내 존재를 기초로 하여 발전하는 인위적으로 끊을 수 없는 타자성으로 이어진 한 객체라고 생각한다. 이때 부모의 역할은 자식과 하나되면서 그 자식의 바깥이 될 수 있어야 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대학을 가는데 자식의 바람보다는 아버지나 어머니의 욕심으로서 가는 경우가 적지 않다. 특히 그 집안이 돈이 많고 배운 것이 많고 명예가 높은 집안일수록 세상적인 시각에서 자유로울 수 없고 또한 그런 부와 명예를 축적한 부모는 자식도 그런 본인을 닮아 그런 길을 밟아 와주길 바라는 욕심이 있기 때문에 자식을 본인이 만들기 위해 노력하지만 사람이라는 객체는 한 사람의 욕심에 의해 만들어 지는 것이 아니고, 두 사람의 교통과 하이데거식 홀로 있음을 탈피한다는 가정에서, 만들어 나가는 것이 아니고 이루어 가는 것이라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자식을 쥐는 것보다는 적절한 때 놓아주고 어떨 때는 혹독히 훈련시킬 줄도 아는 부모가 되어야 바른 자식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즉 부모의 자식은 부모이면서 부모가 아니라는 결론을 낼 수 있을 것이다.
6과는 비밀과 자유로서 전체과 무한의 대비로 시작한다. 어찌 보면 전체라는 개념이 무한이라는 개념 안에 속할 것 같은데 이것을 역설적으로 대비시켜 차이를 추출해 내는 것을 보면서 사고의 전환에 대해서 한번 생각해 보게 된다. 그러면서 윤리라는 것에 대해서 생각해 보았는데 윤리란 전체성이나 전체성의 위험에 대해 이리저리 추상화된 생각을 한 후에 뒤 따라오는 그런 것이 아니라 그보다 먼저 그리고 독립된 차원의 제일철학일 것이다. 윤리의 기초에는 인간의 양심이 존재하는데 칸트는 이 세상에서 이해할 수 없는 것이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하늘에 저 많은 별이 빛나고 있는 것과 한가지는 내 마음 속에 양심이라는 것이 존재하여서 항상 빛나고 있다는 것이다. 즉 윤리에서는 있음에 대한 전체성과 있음에 대한 초월성 양자가 다 필요할 것이며 윤리라는 틀에 묶여서 즉 내려오는 전통에 묶여서 잘못된 것에 따르는 것에 과감히 반항할 줄 아는 것도 필요할 것이고 또 가끔은 본인이 믿는 것에 대한 의심과 반할 수 있는 용기도 필요할 것이다. 그러면서 전제되는 것은 나라는 존재는 남과 묶어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마주하는 것이라는 것이다. 이것을 이루기 위해서는 존재 자체의 독립성과 절대적 고독의 필요 즉 나의 깨달음과 각성이 수반되어야 할 것이다. 지금은 대부분의 나라에서는 자유 민주주의를 채택하여 실현시키고 있는데 즉 자유라는 것의 최소한의 보장과 개인의 사적 자유 즉 비밀에 대해서도 법적으로 보장하고 있다. 하지만 요즘 자유 민주주의가 보장하는 자유와 비밀에 대해서 논란이 많다. 어디까지 자유를 보장해야 되는 것이고 어디까지 비밀을 지켜주어야 하는 것인가에 대해서 정확히 선을 그을 수 없기 때문에 논쟁거리가 되고 있는데 여기서 자유주의 속에서도 비밀을 존중할 줄 알아야 되고 무한정한 자유 속에서는 제한할 줄 알아야 할 것이다. 하지만 비밀을 줄이고 자유가 존중되기도 하여야 하는 언어적 표현으로는 모순일 수 있지만 궁극적으로는 진정한 자유 민주주의를 이루기 위해 필요한 것이다. 그러면서 중요한 것은 개인간의 소통을 통해서 비밀이 깨어져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이 때 가끔 인간은 상대방의 이성을 과소평가하고 소통할 때가 있는데 이성과 보편화하려는 이성의 노력을 과소평가해서는 안되며. 또 크게는 이런 자유와 비밀이 가장 중요하고 잘 이루어져야 할 곳은 국가라고 할 수 있다. 우리나라는 여태까지
7과는 얼굴이라는 것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다. 얼굴이란 상대방에게 전적으로 드러나는 신체의 일부분이다. 전신 거울 앞에서 섰을 때, 신체의 다른 일부분들은 모두 옷을 입기 때문에 드러나지 않지만 어떻게 하더라도 얼굴 특히 눈과 코 입과 귀는 드러나게 된다. 또 사람 눈을 일컬어 마음의 창이라고 하는 것은 눈을 통해서 그 사람을 알 수 있고 그 사람의 기분과 상태에 대해서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얼굴이란 정직하기 때문에 위험 앞에 노출되어 있고 본인을 노출되어 있고 가난과 부족함을 드러내는 부분이기에 감추고 싶은 부분이기도 하지만 얼굴을 통해서 사람을 끌어들일 수도 있고 그 자체가 매력이 될 수도 있다. 또 사람을 처음 대면할 때 가장 먼저 보는 곳이 대부분 얼굴이기 때문에 좋은 인상은 그 사람을 기억하는데 있어서 큰 장점이 될 수 있다. 즉 쳐다보는 것은 지각이요 앞에서 언급한 앎이라고 할 수 있다. 즉 사람이 얼굴로 얼굴을 마주치고 나아가는 것 그 자체가 윤리라고 할 수 있다. 윤리라는 것은 아무도 보지 않을 때 본인이 지켜야 하는 것도 있지만 전제는 공동체 생활을 영위하기 위해서 법처럼 강제적인 것은 아니지만 전통적으로 그곳에서 내려오는 사람 간의 소통이 이루어진 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 줄이면 사람 간의 대화 더 줄인다면 얼굴 간의 대화라고 할 수 있다. 또 얼굴이란 나가 나를 알 수 있는 가시적인 유일한 공간이라고 할 수 있다. 내가 나를 알고 있다는 것을 객관적으로 표현할 수 없는데 이는 내가 나를 제일 잘 알지만 어디까지 알고 있는 것인지 본인도 모를 때가 많기 때문이고 본인을 표현하는데 있어서도 머뭇거리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극단적인 예를 들어서 “나는 어디서 왔고 누구인가?” 라는 질문에서 자유로운 사람은 거의 없다고 생각한다. 물론 종교 안에서는 답이 있겠지만 사람 자체를 세워놓고 질문을 던진다면 대답을 못할 정도로 기본적이지만 나의 본질적인 것에 대하여 잘 알지 못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즉 내가 나에 대해서 아는 부분은 수박 겉핥기 식이라고 할 수 있으며 우리는 본질적인 것을 놓치고 잡고 있는 부분은 사소하거나 남들도 대부분 알 수 있는 부분을 알고 있지만 더 중요한 것은 내가 나를 알려고 별로 노력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흔히 그냥 살아가는데 바쁘고 자기 일에 충실하다 보면 자신을 놓치고 살 때가 많다. 그냥 존재하는 본인만 알 뿐이지 그 이상은 알지도 알려고 하지도 않는 자세가 문제일 수 있다. 또 얼굴을 대면하는데 있어서 욕망과 필요는 구분해야 하는데 상대를 알려고 하는 자세가 욕망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욕망이란 채워질 수 없는 것, 즉 상대에 대해 알려고 하는 것이 욕망이 된다면 그것은 상대에게 고통을 가할 수도 있게 되고 피해를 주기 때문에 앎에도 것도 어느 정도 절제가 필요하다. 즉 상대에 대한 앎의 넘지 말아야 할 선은 필요이며 필요란 꼭 알아야 되는 부분과 함께 그 필요에 의해서 나만이 아니고 상대방도 충족되는 선을 말한다. 인간이란 유한적인 존재이며 길어야 100살을 사는 존재이기 때문에 평생을 앎에 인생을 바친다고 해도 모든 것을 알 수 있는 없는 존재일 것이다. 즉 다 안다고 해도 그것은 책의 말을 인용하자면 ‘다른 것’을 ‘같은 것’으로 인지하는 것밖에 되지 않기에 서로 간에 대하는 얼굴에 대해서 마지막 선에 대해서는 지켜주어야 된다.
8장은 다른 사람에 대한 책임이라는 제목으로 시작한다. “나는 나이고 다른 사람은 다른 사람인데 내가 왜 다른 사람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하는가?” 하고 질문할 수도 있지만 사람은 기본적으로 공동체에 대한 책임이 있다. 왜냐하면 어떠한 사람도 공동체에 속하지 않은 사람은 없기 때문이다. 하다 못해 ‘누구 집의 몇 번째 아들’, ‘몇 학년 몇 반 반장’ 등과 같이 어떤 공동체로 묶어서 얘기하는 것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즉 다른 사람에 대한 책임성으로 언급할 수 있는데 어떠한 주체성을 가진 대상에 대해서 가지는 책임성은 일단 가벼운 것일 수 없고 상대방과의 관계에 연결되는 것이기 때문에 윤리와도 직결된다고 할 수 있다. 또 레비나스는 다른 사람이 책임을 이행하지 않아도 본인은 책임을 이행해야 된다고, 그것이 이상적인 이야기일 수 있지만 그런 유토피아적인 가정을 통해서 이루어져야 할 것을 언급하는데 이것은 계속될 수는 없을 것이다. 물론 어느 정도는 상대방이 책임을 이행하지 않아도 참고 인내하고 노력하는 것이 필요하다. 세상이라는 것이 본인이 투자하고 노력한만큼 모든 것이 돌아오고 알아주는 곳은 아니기 때문에 또 공동체 생활에서 항상 이익만을 보면서 살 수는 없기 때문에 그런 희생 정신으로 몇 번은 할 수 있지만 그것이 악용되어서 책임을 이행하지 않는 사람에게 ‘저 사람은 내가 책임을 이행하지 않더라도 계속 이행하기 때문에 괜찮아.’ 하고 악용될 수 있다. 물론 사람을 끝까지 믿어보는 방법이 있을 수도 있지만 실존의 세계에서는 가정이 현실을 무시하고 지속되면 그것은 과대망상으로 치부되지 유토피아로 치부되지 않는 어찌 보면 슬픈 현실이기 때문이다. 또 제일 중요한 것은 내가 내 인생에 책임질 수 있는 자세를 가지는 것이다. 법적으로는 만 20세를 기준으로 성인으로 취급하며 성인이라는 것은 본인의 행동과 말에 대해서 책임을 질 줄 아는 사람을 가리키는데 즉 그때부터 부모님의 보호생활을 떠나서 사회생활을 시작하기에 내가 나를 소중히 여길 줄 아는 것이 다른 사람의 책임을 지는 방법 중 첫 번째라고 생각한다. 본인이 본인을 귀하게 여길 줄 모른다면 다른 사람을 귀하게 여긴다는 것은 힘들 것이다. 이 세상의 주체는 일단 나이다. 본인이 죽으면 친구도 부모님도 주위 모든 것들도 존재하지 않게 된다. 물론 내가 중요하다고 해서 개인적 이기주의로 빠지면 안되지만 적어도 내가 소중한 존재임을 깨닫고 소중히 여기는 자세는 필요하다. 그리고 세상에서 나는 둘도 없는 사람이고 다른 무엇과 바꿀 수 없는 사람이기에 다른 사람도 그럴 것이라고 생각하며 서로 위해줄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 할 것이다. 시간이 갈수록 개인만을 위하고 주변을 돌아보는 시각이 줄어들고 있다. 조금만 고개를 돌아보면 나보다 못한 사람들 즉 독거노인 소년소녀 가장 장애우들이 많지만 그들에게 쉽게 다가가지 못하는 이유는 익숙하지 않기 때문이다. 한 장애우가 “사람들은 마음이 아파서 우리를 쳐다보지 못한다고 하지만 우리가 상처받는 것은 사람들이 우리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는 것이 상처입니다.” 라고 말한 적이 있다. 즉 우리의 작고 편협적인 생각을 기본적으로 하는 행동이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줄 수 있다는 소리이다. 작지만 다른 사람에 대해서 책임 질 줄 아는, 그런 사람이 되도록 얼굴 대면과 앎이라는 것에 즉 다른 사람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고 충실한 사람이 될 줄 알아야 할 것이다.
9장은 증언의 영광이라는 것을 언급한다. 여기서 나타내는 증언이라는 말은 구약시대 예언자들의 예언을 빗대어 한 말인데 예언자들의 증언은 신에게서 들은 말을 그대로 옮기는 것이라 그것은 앎의 차원이 아니라 계시의 차원이라고 할 수 있다. 즉 예언자들은 단지 전하는 말을 전달할 뿐이고 그 말 자체는 앞에서 언급한 ‘하는 말’이 된다. 하지만 그 말이 철학으로 유입이 된다면 그것을 주제로 다시 곱씹고 주제로 삼아 앎을 만들려고 하기 때문에 그 자체가 지나간 ‘한 말’ 이 된다. 즉 말의 말됨이 그 말 자체의 힘을 빼앗고 생명력을 잃어버렸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그 말들이 세월을 따라 내려오면서 토론되고 언급되지만 그 말 자체에는 벌써 단절의 흔적 자체가 새겨져 있다고 볼 수 있다. 만약 신이 육안으로 보여서 존재한다면 그 말 자체는 ‘하는 말’이 아니고 뱉어 나온 순간부터 세상에 떨어진 ‘한 말’이 된다. 그렇다면 일단 단절된 말이기 때문에 그 자체의 힘이 줄어들고 자동성보다는 수동성의 역할이 점점 커질 것인데 이러한 이유로써 신이 육안으로 보이지 않는다고 주장할 수도 있다. 그러면서 이 책에서는 무한에 대해서 언급하는데 무한이란 무한의 외면성이 증언의 성실성 안에서는 어떻게 보면 내면성이 된다고 언급한다. 여기서 외면성이란 내면성이 돌아선 것을 의미하고 내면성이란 외면성이 돌아선 것을 의미한다. 즉 무한이라는 외면성과 내면성은 따로 떨어진 것이 아니라 궁극적으로는 하나라고 말할 수 있다. 어떠한 주제에 대해서 잡히지 않고 들어오지 않는 것은 외면성의 성격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면서 여기서 무한이란 얼굴을 뜻한다고 하면서 내가 옳을수록 그만큼 내게 더 책임이 있다고 여기는 자세에 대해서 긍정적으로 나오는데 책임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결과적으로 다른 사람에게서 벗어날 수 없다고 주장한다. 또 영광이라는 것은 흔히 종교적인 곳에서 많이 쓰는 단어이다. 기독교나 천주교 그리고 그리스 정교 이슬람교 등에서 많이 사용되었고 종교전쟁이 일어난다면 각자 자신의 ‘신의 영광을 위하여!’ 하고 언급하는 경우가 많지만 예부터 영광이라는 단어로 많은 잘못된 것을 덮어온 역할을 하지 않았나 생각해 본다. 물론 영광이라는 것은 신 자체에게 존재하는 성스러운 것이지만 그것이 인간에게 자율적으로 떨어졌을 때, 그 영광을 유지한다는 것은 유한적인 인간으로서 불가능하다고 할 수 있다. 유혹과 시련이 그 영광을 망가뜨리기 위해서 많은 공격을 하고 또 본인이 그 영광이라는 것에 취해서 영광을 가려버리는 경우도 생길 수 있다. 영광이 오히려 인간의 윤리와 무한에 있어서 어찌 보면 도움이 된다기 보다는 방해가 될 수 있는 전적으로 신의 영역으로 남겨두어야 하는 한 객체가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바른 생각일 수 있다. 어차피 우리가 피조물이고 하나님 안에서 공동체 생활을 한다면 그 자체 내에서 그 분의 말씀을 지키고 뜻대로 사는 것이 영광이지 어떠한 객체와 현상을 통해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또 영광이라는 것은 흔히 세상에 드러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어떤 방법을 통해서 나타나기 때문에 나타남이 중요한 것이지 그것이 나타나는 과정이 더 중요하게 여겨져서도 안될 것이다.
마지막 10장에서는 철학의 어려움과 종교의 위로라는 말로 언급하기 시작한다. 철학이란 흔히 우리가 범할 수 있는 오류가 어렵고 복잡하기 때문에 일반인들은 쉽게 다가가기 어렵다는 것이다. 하지만 철학은 우리 삶 자체가 철학이라고 생각할 수 있는데 아침에 일어나서 생활하고 밥을 먹고 사람을 만나고 등등.. 이러한 단순한 행동들 사이에 본인의 철학이 들어 있고 또 그런 것들을 통해서 드러나기 때문에 일단 철학에 대한 사고관부터 바르게 확립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리고 철학자들도 물론 지식이 적은 것은 아니지만 철학에 대해서 사람들이 쉽게 다가갈 수 있도록 쉽게 책을 쓴다거나 일상생활에서 흔히 접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야 할 것이다. 대중과 동떨어져서 홀로 흘러가는 철학은 배에 선장이 없고 그냥 바람에 흘러가는 배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종교와 철학, 둘 다 세상에서 진리를 위한 외줄타기를 하고 있는 학문들입니다. 쉽지 않고 아니 어려운 학문들이지만 그것들을 회피하는 것이 아니고 세상과 부딪혀서 결국은 이겨낼 수 있도록 모두가 노력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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