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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교회사 본문

중세교회사

빛나는 새벽별 2018. 8. 22. 06: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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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R.W. 서던

 

출판사 : 크리스챤 다이제스트

 

가격 : 15,000원

 

중세교회사 책에 있는 것을 그대로 많이 옮기긴 했지만

읽어보면 중세에 대하여 크게 이해하는 것에는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말 그대로 정리이기에 내 의견보다는 책을 그대로 인용하는 것이 낫다고 판단했다)

저자의 모든 의견을 동의하는 것은 아니지만

중세의 큼직한 주제들을 잘 다루어져 있다고 생각한다.

 

 

책을 쓴 목적 : 중세 교회의 종교 조직들과 사회 환경의 상호 관계를 파악하는 것

 

이 책의 교회상 : 보다 현실적으로 냉철하고 지상적인 교회의 상

중세의 제도들은 모체가 된 사회 형태와 훌륭하게 융합한다(그래서 살아남았다)

중세는 교회와 사회가 동일한 특징을 지님

중세교회 = 강제적인 사회 = 국가(모든 조직 구비) = 경찰국가(치안담당이 없었음)

세속군주는 생황 기반의 붕괴와 사유권을 지키기 위해 교회에 순응

 

중세 : 서유럽의 역사에서 교회가 합리적으로 유일하고 참된 국가라고 주장할 수 있는 시기이자,
사람들이 최우선적인 정치적 권위가 교회에 있다는 생각을 가지고 활동하던 시기

중세의 통일성은 고대 세계의 통일성을 끌어와 효과적으로 보존한데서 기인한 것

 

중세의 전성기 : 12-13c

중세초기(700-1050) - 유럽 기본적 제도들이 나타난 창조와 생존의 엄격한 시기

- 서유럽이 그리스와 이슬람에 비해 열등함(한쪽은 종교체제 전승, 한쪽은 대안)

- 베네딕투스 종교회(유일한 종교적 이상으로 등장)

- 수도원 설립자들은 영원과의 물리적인 교제를 통해서 안정과 안전을 꾀함

- 성유물은 교계가 성인들의 능력은 세속 군주가 사용하였다.

- 정부는 가변적 특징을 지니는 폭력과 무능을 겸비했기에
초자연적 재가를 받는 것이 중요

- 초자연을 중요시하다 보니 개인을 중시하지 않게 되어버림

- 즉 인간의 연약함이 중세 초기 성과들의 힘과 안정을 의도치 않게 받쳐주게 됨

 

2. 성장의 시기(1050-1300) - 이성과 지성적인 체제의 시기

 

- 세속 군주 지위 강등(=성직자 권위가 유일한 초자연적 통로로 부각),
교황이 세속 문제 개입, 베네딕투스 수도회 지위 상실, 법과 신학에 새로운 자극,
물질세계를 이해하고 통제하려는 노력

- 11세기 말부터 12세기 초까지 경제 발전이 중요 요인으로 거론됨

- 서유럽의 확장
(원인 : 자본 축적, 인구 증가, 지중해 장악, 그리스 이슬람 정치적 쇠퇴 등등)

- 인구증가, 전문 지식의 필요, 행정과 전문화의 과정 속에
기존 종교의식보다 세련된 답변 요구

- 세속 군주의 성직 강등이 되면서 정부는 활동범위 넓어지고 순수한 세속국가로 발전

- 전문성이 평신도의 지위 강등케하며 동시에 성직자 지위 상승(=세속 군주 지위 강등)

- 즉 성직자는 이익에 관심을 가지고 단결하지만
평신도(단 길드 존재)와 세속 군주는 단결성 x

 

3. 불안의 시대(1300-1550) - 체제보다 직관이 강조, 이성보다 의지, 사랑, 자유영혼 강조

- 교황의 직위가 불안정성이 생기기 시작 ex>아비뇽 유수

- 변화의 첫 번째 : 도시와 농촌의 인구 증가 비율의 차이(도시>농촌) / 상업의 발달
도시에서 사람이 모이고 의견을 표출하기 시작

-> 운동들이 점점 강해져 진압이 불가능

- 사회적으로 계급 조직의 틀이 현실성 없고 잘못된 것일 수 있다는 시각의 시작
+ 교계의 이론 체계의 적실성과 타당성의 의심 시작

- 사상가들이 실질적 성공을 거두지 못한 이유는 강력한 의견 집단이 없었음

(세속 군주는 교계와 이해관계를 적대시하면서도 민중보다는 많은 것들을 서로 공유)

 

기독교 세계의 분열

 

5개총교구(알렉산드리아, 안디옥, 예루살렘, 로마, 콘스탄티노플) 중 앞 3개가 이슬람권에 무너지면서 나머지 2개의 교구가 연대할 수 밖에 없었음. 많은 부분 하나가 되었으나 결국 황제 콘스탄스 2세가 비잔틴의 통치하에 두기 위해 노력을 기울이다 살해되면서 지중해 동부 통일은 x

정치 상황과 정통신앙 수호 태도 차이 속에 729년 화상파괴운동으로
로마와 콘스탄티노플 갈라짐

서방은 교황을 지지하지만 그리스인들을 경멸하고 미워함

필리오케 논쟁(동방은 받아들일 수 없는 입장, 서방은 받아들이는 입장) = > 분열

 

재통일을 위한 모색

크게 3가지 =>

1)무력통일 방식 서방의 방식
2)일괄타결의 정치 협상 방식
교황청 외교와 그리스 현실적 필요로 공동의 산물
3)종교적 화해의 방식 동방과 서방이 독특한 기여를 함
=> 앞의 두 방식이 실패로 끝났기 때문에 3번째 방식이 대두되게 됨


1) 무력통일 방식의 대표 : 십자군 전쟁
but 칼로 문제 해결하기를 주저 :
십자군 원정이 철회될 수 없는 방향으로 감행되기까지
그리스인들이 약하다는 사실이 제대로 평가되지 않음

사람들이 습관적인 행동에 젖어 폭력으로 문제해결을 꺼렸음

교황청이 콘스탄티노플에 대해 군사 원정 감행하려 할 때 큰 정치적 위험을 감수
해야 했음(가문들의 신장세력 경계)


2)정치적 일괄 타결 : 교황이 그리스 교회에 복종을 받고 그리스 황제를 지원하는 것
(조건 : 평신도 성직자 등 모든 사람이 자기 지도자들이 합의한 상황을 받아들인다는 전제)
토론을 할 만한 공동의 원칙이 없는 양측이 이익 맞교환하는데 목표두는 협상
-> 이해의 길
= 상대 진영 장점 인정

자기 비판 그리스제국 쇠망과 해체, 공의회 운동(실패 : 강력한 교황제 덕분)

상대가 없으면 무엇인가 빈 것 같은 협력 의식

 

 

 

 

 

교황에 관하여 피상적이지 않으면서 간략히 기술하려면 논의할 질문 자체를 한정할 필요가 있기에 몇 가지로 구분해 보면

1. 중세의 다양한 시기에 교황은 실제로 어떠한 권력을 소유했는가?

2. 이 실질적잉권력은 교황들이 이론적으로 주장했거나 다른 사람들이 대신 주장해 준 이론적인 권위와 어떤 관계가 있었는가?

3. 이 권력은 비록 크긴 했지만 왜 더 크지 못했는가?

 

초기 시대(700-1050)

- ‘콘스탄티누스의 증여는 비록 위작이지만 당시 이상과 현실을 비교할 수 있고 후대와의
차이를 판단하게 할 수 있음(이것으로 최초의 기독교황제가 중세 교황의 모든 기본 사상 진술)
- 그 당시 초기는 과거를 이상화한 현재라 믿었고, 그러기에 현재의 이론들을 과거 사실들로
대표하는 식으로 작성(그래서 초기 허구 문서들이 아주 중요)

성 베드로의 대리자(교황)

- 성 베드로의 대리자가 교황이라는 것이 가능한 이유는 서방에서 그 어떤 것을 부정한다 할
지라도 교황이 교회에 대해 성 베드로의 모든 권위를 소유했다는 사실을 부정한 사람이 없었음
(성 베드로의 행적이 분명하고 교리 제정 및 주교좌들 설립모습이 그로부터 시작)
- 베드로의 상징은 천국 열쇠 관리인(천국의 현존과 지상교회 사이에 연결고리), 교황은 대리인
- 8-11세기가 로마에서 성 베드로의 영향력이 가장 갈했던 시기
- 서방세계의 기독교 통일의 원동력은 교황의 활동이 아닌 성 베드로에게 인도한 자발적 의욕
- 신임대주교들이 필리움을 받으러오면 교황이 판단하므로 신앙 고백이 복종 체계로 수립

최고의 세속 군주

- ‘보편 주교성 베드로의 대리자라는 교황의 지위는 서유럽의 현실 상황에서 위축되었음
이유인즉 문서상으로 교황이 확신을 가지고 단결심에 호소할 수 없었기 때문에
- 서방을 교황권의 확장권으로 보는 것이 잘못되었다는 견해의 근거는
1) 당시 교황이 황제를 세울 때 대리자를 세우지 않고 경쟁자나 지배자를 세웠고
2) 교황은 서방의 그리스도인들에게 대한 반감을 이용할 수 있었지만, 황제들이 권력과 명성에
자기들보다 몇 단계 위인 군주들에게서 배우는 것을 막을 수 없었기 때문에

성장의 시대(1050-1300년경)

- 교황의 권위 주장 변화를 알아볼 때, 1049-1054년 교황 레오 9세를 알아봐야 함
(교황제와 관련지을 수 있는 거의 모든 것이 그의 주도로 시작되었다)
- 과거 교황제 향수와 세력을 넓히기 위한 방법 연구(과거 흔적 연구=> 콘스탄티누스의 증여)
- 그레고리우스 7세의 서신집에 의해 교황 지위에 대한 진술이 정리
- 성 베드로의 대리자에서 그리스도의 대리자로 의미가 옮겨감
(권위 근원에 대한 확인 필요, 과거의 전승이 아닌 자체적 권력을 가질 필요성을 느낌)
- 교황 수위설이 인간 행위를 위해 고안된 체계 중 장엄하고 통일되고 발전한 것은 맞지만
실제적인 적용이 문제가 되는 부분임
- 7-12세기 공의회 거의 열리지 않고 서방 관점은 중요치 않으며 비잔틴 영토에서 열리고
서방 대표들이 참석하지 않았지만 1123년 이후 200년간 입장이 완전 뒤집어진다.
(교황의 활동이 1050년 경 살아나 1130년 경 절정을 이루는 것을 볼 수 있음)
- 중세 정부의 특징은 군주가 시혜를 베푸는 사람인 동시에 정의를 집행하는 사람이었다는 것
(하지만 교황이 군주를 능가하던 시기는 교황이 시혜와 정의 집행을 잘 할 수 있었기 때문)
- 교황은 세속 군주에 대하여 뿌리 뽑고 무너뜨리는 일은 할 수 있으나 세우고 심는 일은
할 수 없었다
- 11-12세기 교황제가 성공할 수 있었던 이는 수도회들의 지원이 있었기 때문이다
- 12세기 이전 유럽 군주는 성직자를 직접 임명해서 경제적인 부분을 확보하며, 12-13세기의
성직자들은 훌륭한 세속 정부의 대리인들이었음
- 1159-1303년 교황들은 모두 법률가였으며 이 때 교황청은 주로 법제정 및 집행에 집중
(그렇기에 교황제의 정점을 찍을 수 있었음)

악성 인플레이션(1300-1520년경)

- 14세기 부터는 교황청의 주 의미가 관공서로 변하게 됨
- 세속 정부와 교황청의 발전은 복잡성을 낳았고 더 많은 관리와 업무를 만들어내게 됨
- 1. 면죄부 2. 국제 문제의 교황의 중재 역할 3. 교황의 성직록 임명 체계 복잡화
3가지를 통해 중세의 마지막 교황제와 유럽 사회의 관계를 파악할 수 있음

면죄부

- 1095년 우르바누스 2세로부터 면죄부 시작(십자군 전쟁)
- 면죄부의 확대(전쟁 참가자-> 도와준 사람 -> 특별한 상황 -> 고해신부를 통한 개인의 면제)
- 로마에 갈 능력이 있는 자들은 연옥에서 형벌을 면제받을 수 있었음
- 갈수록 면죄의 대상이 확장되자 그것을 제한할 수 없는 데까지 이르게 됨(타락)
- 면죄부의 인플레이션(발행할수록 가치가 낮아짐) -> 진실성에 대한 의심의 시작(교황이 가능?)
- 13세기 말에 면죄부는 큰 유익이 있었지만 1300년부터 지나친 정교화와 혼란이 시작되며
교황의 타락보단 면죄부 제도를 밀고 가려는 압력이 사방에서 주어지면서 소망 희미해짐

국제정치

- 교황은 영적인 칼을 직접, 세속적인 칼은 황과 제후들의 중개를 통해 영향을 끼침
- 정치적 수장권은 교황 혼자 해결 못하고 황제가 필요함, 그러면서 직접적 세속적 행동으로
뒷받침되지 않는 간접적 권력은 무의미함을 깨달음(=영적, 세속적 2가지 모두 가지기가 힘듬)
- 하지만 중세 전쟁 중 중재자와 보증인으로서의 위치는 강력하게 살아있음(영토상 손해가 없음)

성직록 쟁탈전

- 성직을 임명하려면 성직자(추기경), 교구민(지역 귀족), 주교의 공감이 필요함
- 교황 선출은 아비뇽 시대 제외하고 로마 귀족들이 영향을 미쳤고 1179 라테란 공의회를 통해
모든 추기경이 동등한 투표권을 가지며 투표수의 2/3이상을 획득하여야 함을 명시
- 왕도 어느 정도 성직자를 임명할 수 있었다는 사실(즉 성직자 배분 권력이 어느 편이냐 중요)

 


5장 주교와 대주교

 


- 주교들은 과거의 자기들의 운명을 좌우햇던 세속 군주들의 손아귀에 벗어나 교황의 감독과
인도하에 새로운 책임과 유용성을 얻게 됨
- 10세기 이후 교황이 교구 문제에 간섭하면서 12세기 이후에는 주교제가 엄격하게 정의되고
의무 사항이 되었음

주교의 형성

- 주교는 백성을 다스리고, 그들을 위해 발언을 하고, 죄를 위해 제사를 드리고, 자문을 하고
군대를 끌고 전장으로 나가며, 왕을 세우면서 세속적 업무에서는 선택에 의해서가 아닌
백성의 필요를 고려하여 맡는 사람(목표)
- 그래서 초기 왕들은 주교들에게 권고를 많이 하게 됨(왕국의 시급한 현안이었으므로)
- 왕권 분괴는 교회의 평화와 재산을 보장할 수 없게 됨. 그래서 왕이 임명한 성직자들은
세속 권력의 살아있음이 무엇보다 중요
- 동시에 왕들은 봉신들을 보상하느라 돈이 없어 주교에게 의지할 수 밖에 없음(상생의 관계)

교황의 신하가 된 주교들

- 주교들은 교황의 사법권이 침범해 오는 동시에 수도원들이 벗어나는 현실에 저항할 수 없었음
그렇기에 교황의 대리자로 떨어졌지만 그를 통해 오는 이득이 있었고 교황청에서 주교가
참여함으로 전반적인 정부가 확대되면서 자신들의 권력도 커짐
- 중세 교회가 건실했을 때는 주교 제도가 아주 평화로웠음
- 이탈리아, 프랑스(이상 반영), 독일, 영국의 주교를 예로 들며 설명(교제)
- 1050년 이후 두 세기 동안 주교 정부의 전 분야를 돌아보면 가장 큰 특징은 교황의 통제에
갈수록 굴복해 간다는 사실이고 이것은 교회법의 발전으로 이어진다.
- 교황청 관계에서는 밑이지만 여러 분야에서 기반을 다져나감(사법권,재산,윤리적기준 등등)

 

 

 

* 수도회

 

 

 

- 수도회는 중세 유럽에서만 드러나는 기독교적 삶을 온전히, 영구히, 그리고 철회할 수
없이 시행하기 위한 구별된 공동체(일치성의 이유는 종신서약을 했기 떄문)

 

특징 신앙 공동체들이 대단히 다양했다(규모, 목적, 생활 방식 등)
다양한 형태를 유지하기 위해 조직들이 확산되었다
세상을 배척하기 위해 설립된 단체지만 수도회가 속해있는 그 사회로 인하여 만들어질
수 있었다.(아이러니) => 수도원의 현세성
* 중세 직업적 종교 생활의 면모를 갖추게 한 요인들
- 수도회들에게 갖는 기대치, 수사들과 기부금 받아들인 방식, 기부자 의도, 평신도 성직자
        신앙관 등등
현세의 것들을 강하게 움켜잡으면서 여원의 보상을 간절히 소원함

 

1) 베네딕투스회

중세의 수도회들의 시작점(서방 최초의 대 수도회 및 수백년 유지, 영향력도 계속 유지)
1100년경 전성기 끝, 하지만 베네딕투스 수도회칙이 완전,보편적 특성을 가지며 가장 존경받음

세속 지도자들이 개인의 용맹보다는 조직과 훈련된 군대가 효과있음을 깨닫고 수도회칙 적용

수도회칙은 짧고 명쾌하면서 경직된 면이 드물며 모두에게 적용 가능(발전, 개선에 여지가 있음)

순종이 중요한 덕목, 순종의 목적은 자기 부인이며 하나님께 돌아가는 수단
수도회의 엄격함 속에는 인간의 연약함을 배려한 지극히 자상한 성격이 포함됨 => 보편성

성무는 한밤중의 긴 성무와 일곱 번의 낮 성무로 구성

6세기 수도원은 당시 환경의 실질적 정보 부재와 성 베네딕투스 수도회칙과 비교할만한 표준이
없기에 파악에 어려움이 있음 => 베네딕투스는 전임자 수도회칙을 변경(간결, 명쾌, 생략과 첨가)

 

설립이유

수사들을 모집하는 문제를 살펴봄으로 중세 교회에 끼친 영향을 알아보려 함

부류 : 장년 평신도, 성직자, 귀족의 자제들

 

 

사회적 기능

수도원이 개인의 구원을 추구하는 수사들을 위해서만 존재하지 않았음

권력자들은 자기들의 현세적이고 영원한 안위가 똑같이 수사들의 전쟁에 달려 있다고 믿음

 

고해의 기능

수사들을 통해서만 고해의 기능이 작용 가능

중죄는 고행이 지나치게 무겁고 일상 생활 불가능 -> 대리 고행 제도의 필요


 

가문적 기능

영생을 얻기 위해 뿐만이 아니라 가문의 경제를 위해서도 구성원들을 수도원에 보내야 함
(수도원을 통해 귀족 가문의 자녀들에게 상당한 귀족 생활과 출세의 기회 제공)

시간이 갈수록 귀족 사회의 기부가 수도회의 원만한 운영을 위한 필수적 요소가 되어버림


 

 

변화와 쇠퇴(1060년 이후 서서히 변화를 예고하는 징조들이 등장)


 

 

영적인 침체

사회적, 지적 변화들의 충격으로 수도회를 유지하던 요인들이 흔들리기 시작
(고행 대행, 인류의 적들과 전쟁, 정부의 사업과 가정의 안정 등의 요인이 흔들림)

즉 외면적 사업에 완전을 추구하느라 개인을 잊어버림

수도원 안의 불필요한 관습들, 진리로 관습을 공격하고 교황 권위 옹호가 침체의 원인이 됨


 

경제적 침체

과거 많은 부를 소유했지만 갈수록 세속 재산 가운데 적은 것만 차지하게 됨
(재산이 흩어져있어 관리의 어려움) -> 수도원의 유대 관계와 수도원의 일과를 느슨하게 함


 

쇠퇴의 징후

전반적인 숫자의 감소(수도원이 복잡해지면서 수도사 자체보다 행정과 병자와 관리 요원만 증가)

수도원의 자원이 줄어들면서 사회적 베타성이 줄어들음(물질이 필요하기 때문에)

- 개혁의 시도 => 인토켄티우스 3: 참사회 제정(=수도원들 총회)

(하지만 재산 증식으로 관리에 많은 신경이 써지고 이는 수도원 초기 목적과 멀어질 수밖에 없음)


 

2) 새로운 수도회들

 

- 11세기 말 베네딕투스회의 독점이 무너진 사회는 서구 사회가 급속히 확장되기 시작한 시기

(삶과 기회가 다양해지면서 생긴 불가피한 결과 = 처음으로 다른 여러 조직 생활이 공존 가능)

베네딕투스회 전승의 서로 다른 측면을 강조해 성공한 수도회 : 참사 수도회와 시토회


 

아우구스티누스의 참사 수도회

 

    과거와 정식으로 결별
=> 아우구스티누스를 베네딕투스보다 먼저 그리고 더 깊은 차원의 신앙으로 인정
그리고 이들은 수도회칙 너머에 있는 어떤 것, 심지어 조직된 교회 너머에 있는 것을 추구
(베네딕투스 수도회를 뛰어넘어 성경으로 돌아가려는 노력)

시작은 아우구스티누스의 편지에서 자신들을 한 동아리로 연결할 삶의 틀 발견

12세기 초 아우구스티누스 추종자들 가운데 2가지 경향
금욕,침묵,노동,찬송 규율 고수하는 엄격함” => 프레몽트레 수도원
육식허용, 노동 필요,모든 것 공유 관대함” => 생 뤼 수도원

아우구스티누스 참사 수도회의 초창기 수도원은 공식적 설립 행위 없이 생김(기부 없이 생김)

우르바누스는 초대 교회를 수도원 형태와 참사회 형태로 봄
수도원 : 지상의 소유 포기, 묵상 전념(마리아의 역할)
참사회 : 지상 소유 활용, 참회와 구제로 죄를 대속(마르다의 역할)

아우구스티누스 참사회는 자기들의 능력으로 세울 수 있는 새로운 종교 재단을 원하고 자기들이 이해할 수 있는 새로운 종교적 이상을 발견한 기부자들로 인해 추진력을 얻을 수 있었음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수도회칙은 베네딕투스보다 검소하면서 모범적인 생활 가능한 기반 마련함

성 아우구스티누스 수도회를 통해 중세 종교 단체들의 유기적 관계에 있던 큰 간격 메꿈이 가능
(사회적으로 필요한 곳에서 모든 편의를 제공 : 검소와 봉사의 자세)

성 아우구스티누스 수도회를 통해 소규모 공동체들이 열정이 식을 때 소멸할 수 있다는 것과
둘째로 참된 경건은 죽어버리고 엄청난 토지 재산만 남는 문제를 교회에 남기지 않았다는 장점


 

2) 시토회

 

아우구스티누스 참사수도회보다 몇 년밖에 앞서지 않으며 같은 시기에 전성기를 가진다

아우구스티누스 수도회가 다양한 방식으로 주변 사회를 섬겼다면 시토회는 도피함
참사회가 사회와 일체가 되었다면 시토회는 주변 사회를 지배
참사회가 소박한 요구와 온건한 규율로 진보를 이룩했다면 시토회는 세상에 공격적 자세를 취함
참사회가 도시나 성에 번영했다면 시토회는 변경 지대 정착지들에서 가장 번성
참사회는 베네딕투스회 수도회칙에 대안을 만들고 관습 배척하지 않고 일정 따랐지만
시토회는 전통과 관습을 배척 / 하지만 자기들의 행위의 정당성을 찾으려는 공통점을 지님

복음 진리 주장에 있어 사토회는 자신들의 방식이 모든 복음’, 참사회는 초대 사도적 교회 주장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 vs 세상 안에서의 활동)


 

첫 번째 문제


Q.시토회의 이상은 완전한 자기 부인, 가난, 단순성, 은둔, 순결, 정교한 영적 생활인데
역사적 역할과 객관적 평판은 공세적, 우월감 있고, 군사적, 관리 능력 탁월, 탐욕

이상과 현실의 괴리를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A. 시토회는 수도원이 일어서는 기반이 되는 토지가 부족했고 십일조세와 지대와 부역과 교회들과 제단들에서 나온 수익금을 무시했으며 기부자들에게 보상이 돌아가지 않았지만 이런 모양이 세상을 등진 것이 아니라 오히려 경제적으로 멀리보는 혜안이 있었던 것으로 보여짐 + 수도회의 조직과 종교적 관점과 기부자들의 필요와 자원이 있었음


 

조직


- 상명하복의 단일 노선의 권위 수립 + 자율적, 내부 체제 완벽, 감독 기구, 외부 간섭x => 효율성
(목표의 폭이 좁고 사역 분야가 작기 때문에 가능했다)

초기 시토회 법 조직은 군대와 같은 정확성과 엄밀한 현실 판단이 뒷받침하는 적극성으로 성공함

시토회는 수사들의 무거운 일상 업무를 덜어주기 위해 평신도 조력자 기용함(초창기 수도원)
더불어 그들을 자기들의 경제 기반으로 삼고 그들에게 엄격한 생활 규율 부과(평수사는 2급 수사)당시 많은 노동자가 열악한 조건을 무릎쓰고 봉사하려는 이유는 사회의 부역 조건이 악화
(세상의 가혹한 체제 속에 오히려 수도희의 엄격한 생활규율이 그들에게는 종교적 시혜로 다가감)

잉여금 처리 문제에 매번 부딪히고 부를 버렸기에 부로 부자가 되어버린 상황
(영광을 얻으려 힘쓰면서 투자는 않함 / 다른 사람의 손실을 딛고 일어난 수사들)

시토회는 미개척지 수도원을 많이 설립(적은 비용으로 질서와 통일을 부여)

 

시도회 덕목의 존속

첫째, 이 수도회는 중세 초기의 특징이었던 수도회칙의 정교화 작업을 거부하고, 초창기의 단순성으로 돌아가려는 움직임을 대변함

둘째, 시토회는 과거의 상상력과 열망을 만족시켰던 잡다한 관습들을 모조리 채택하는 대신에 체계적이고 합리적인 조직을 추구하는 움직임을 대변

셋째, 이 수도회는 유럽 역사에서 가장 관범위했던 시기에 유럽인들의 활동이 나타냈던 무자비하고 공격적인 측면을 대변함

시토회의 처음 실패한 시점은 1200년경

후기 시토회는 열정이 이미 꺼져버렸지만 목표와 엄격한 실행의 철저한 일관성은 남아있게 됨
(마지막 불길은 아우구스티누스 참사수도회에서 볼 수 있다)


 

3) 탁발수도회들

13세기에는 도미니쿠스 탁발수도회와 프란페스코 탁발수도회가 서유럽 사회 패턴에 가장 잘 적응

도미니쿠스회는 성 아우구스티누스 수도회칙 따르고 프란체스코회는 독창적 수도회칙 제정

중세의 제도 교회는 도시 사회에 벌어지는 문제들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음
-> 1349년 흑사병으로 자유와 영원으로 들어가는 운동이 일어남(사회분위기 어렵고 자유스러움)

도시의 자유스러운 분위기 + 대학교의 자유스러운 분위기(지적 활동의 증가와 사회적인 불확실성)

도미니쿠스는 사도적 생활의 단순성, 프란체스코는 진정한 자기 부정과 가난(복종이 아닌)


 

성장

도미니쿠스회는 사역 목표를 뚜렷하게 한정했기에 프란체스코회에 비해 수적으로 적었다

탁발수도회는 도시 중심으로 하는 운동이었지만 시토회는 농촌 사회 및 프랑스 봉건 사회 중심

탁발수도회가 등장함으로 아리스토텔레스의 학문들과 형이상학을 통째로 신학에 흡수함으로써
신학이 급속도로 발전할 수 있게 되었다


 

 

7장 주변 수도회들과 대립 수도회들

 

 

1) 일반적 배경

 

1050-1300년 유럽에서 발생한 가장 크고 생산적 운동들은 모두 질서와 조직을 추구한 결과의
일부였으며 정도 차이는 있으나 저마다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는데 실패

현실과 이상 괴리에 환멸감을 크게 느낀 사람들은 탁발수사였음

에그하르트 설교는 세속 생활의 종교적 가치를 새롭게 강조했으며 진정한 해방이 주는 가난을
영혼 안에서 찾아야 한다고 주장

중세 말기 파괴적 영향력을 행사한 원동력의 일부는 대중의 행동과 여성들의 영향력

대중의 행동 : 기근과 질병으로 인해 절망을 느끼고 이것을 치유하는 것이 대다수 사람들에게
살아가는 힘을 주는데 큰 역할을 함(하늘로부터의 징조)
대중 행동을 통해 제도 교회를 압도하고 문맹과 지식 계층의 경계를 허물고
장래의 일에 확신을 가지는 등 주류 정서에 역류한 대중 정서

 

여성의 영향 : 여성을 지켜주고 높은 지위를 유지시키는 수도회(수녀원이 많은 이유)
사회가 갈수록 치밀하게 조직되고 교회 중심적으로 자리 잡으면서
남성 지배의 필요성이 강하게 대두되기 시작

수도원 조직과 여성이 총괄하여 다스리던 관행이 타격을 받고 전례를 전문화해야 하고
미사가 중보적 가치를 지닌다는 새롭고 보다 엄격한 사상이 대두하면서 수사들의
중요성이 커지면서 수도원이 쇠락
- 수녀원이 설립된 조건과 정황은 종교계에서 여성들의 지위가 낮았음을 보여줌

여성에게 수도 생활의 기회를 주어야하는 필요와 필요를 채워주기 어려웠던 사회 현실

하지만 종교계에 여성들의 입지를 더 늘려주어야 한다는 사회적 압력을 거부할 수는 없었음
ex>시토회(철저히 남성 중심의 수도회였음에도 시토회에 여성이 가입 시작)


 

2. 방언의 혼잡


 

퀼른의 베긴회(수녀들의 모임)


- 흑사병 이후, 남성보다 여성이 증가하고 여성은 보호받기를 원하지만 수녀원은 한정되어 있었다

정규 수녀회가 아니었지만 많은 여성들에게 세속 생활에서 만난 풍랑과 좌절에서 손쉽게 찾을 수 있는 피난처 역할을 했고 직업적 종교생활을 할 수 있는 자유로운 기회 제공

베긴회의 삶에서 큰 주제는 하나님께 대한 헌신, 공인된 수도회칙이 없었음

13세기 중반까지는 교회와 수도회 당국자들에게 상당한 공감을 샀지만 여성들이 누리던 새로운
자유를 탐탁치않게 여기는 사람들이 많았음 -> 이후 금령, 법령, 교황 등에 의해 베긴회 사라짐


 

데벤테르 형제회(남성들의 모임)


- 데벤테르는 상업 인구가 주였고 많은 수사들이 있었지만 강한 호소력을 발휘하지 못함

헤라르트 흐로테 : 보수주의에 조직과 정조(snetiment)상의 상당한 자유와 참신함을 접목시킴

여성을 위하긴 하지만 여성에게 엄격한 기도와 노동 생활 부과

수도회칙과 구속력 있는 서약이 없었고, 일상 업무를 생계 수단으로 삼았으며, 평신도들이 공동체에서 성직자들과 섞여서 성직자처럼 사는 자유를 누린 것이 데벤테르 형제회의 특징

자립해서 일을 해나갈 수 있었던 지식인들로 구성(공격에 대해 침묵이 아닌 같은 공격으로)

노동의 가치를 강하게 신봉하게 됨(구걸이 좋은 것이 아니다)

서책 필사 부분을 통해 신앙적 안정을 기여했고 생활 방식을 지킬 수 있었음

효과적이고 개인적이고 체험적인 신앙을 추구

기존의 이상과 본질적으로 다른 이상을 추구했음 -> 중용과 무조직과 꾸준한 내적 조명 추구

세상을 적당히 등지고 적합한 신앙을 제공하게 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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